2020년 8월 21일. ‘구보씨’는 아내와 초등학생 남매를 데리고 집을 나선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평균 기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더니 완전히 아열대 날씨다. 이런 날은 백화점에 가는 게 제일 좋다. 시원하고 널찍한 놀이공간에서 아이들은 뛰놀고, 부부는 그림 전시회를 보고…. 그리고 온라인으로 주문했던 아이들 옷을 찾고는 저녁 식사를 한다. 다시 한번 먹고 싶은 메뉴의 식재료를 매장에서 사갖고 돌아오면서 다음 주에는 사진전을 보리라 마음먹는다. 구보씨 가족에게 백화점은 더 이상 쇼핑하는 곳이 아니다. 지금 추세로 봐선 백화점은 조만간 이렇게 변모할 것으로 보인다.
◇1930년 첫선=사실 백화점은 ‘여러 가지 상품을 부문별로 나누어 진열·판매하는 대규모의 현대식 종합 소매점’(네이버 국어사전)이지 문화공간은 결코 아니었다.
1852년 프랑스 파리의 ‘봉마르셰’가 지구촌 첫 백화점이다. 근대적인 도시소비문화의 상징인 백화점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78년 후인 1930년이다. 지금의 신세계본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오픈한 미츠코시백화점이다. 그 이듬해인 1931년 민족자본 백화점인 박흥식의 화신이 처음 문을 열었다.
미츠코시는 1945년 해방 이후 ‘동화’로 이름을 바꿨다. 1954년 미도파백화점, 1955년 신신백화점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동화는 1963년 삼성이 인수하면서 신세계백화점으로 다시 바뀌었다. 1969년 신세계는 직영백화점으로 새롭게 출발, 국내에 본격적인 백화점 시대를 열었다.
◇1980∼90년대 전성기=요즘은 유통업계에서 면세점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꼽히지만 1980∼90년대에는 백화점이 그랬다. 기업들은 ‘마이더스 손’인 백화점 사업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최근 면세점 진출을 위해 기업들이 발 벗고 나서는 것처럼.
롯데쇼핑센터가 1979년 문을 연 이후 서울 시내에만 10여개의 새로운 브랜드 백화점이 탄생했다. 여의도백화점(1983년), 영동백화점(1983년), 뉴코아백화점(1985년), 현대백화점(1985년), 그랜드백화점(1986년), 쁘렝땅백화점(1988년), 삼풍백화점(1989년), 갤러리아백화점(1990년), 그레이스백화점(1992년), 경방필백화점(1994년), 애경백화점(1993년), 삼성플라자(1997년) 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7년 백화점 수는 전국에 109개, 서울 시내에만도 33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1997년 IMF 경제위기가 터졌고, 그 이듬해 미도파 도산을 신호탄으로 줄줄이 문을 닫았다.
◇역신장하는 백화점=신세계 롯데 현대 갤러리아 4강 체제로 재편된 백화점 업계는 새천년 들어서도 여전히 유통업계의 꽃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꽃은 생기를 잃고 있다. 통계청이 내놓은 소매업태별 매출에 따르면 2014년 백화점은 전년 대비 1.61% 역신장했다. 지난해 세월호 사태 때문에 역신장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같은 기간 전체 매출은 1.42% 신장했고, 편의점은 8.66%, TV홈쇼핑 등을 포함한 무점포소매는 7.04%나 신장했다. 면세점을 포함한 대형마트도 3.42% 매출이 늘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20일 “백화점 매출이 역신장한 것은 IMF 때와 2003년 카드대란 때 정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온라인 채널 강세=백화점 매출 하락의 가장 큰 이유는 장기적인 경기침체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확연한 신장세를 보이는 유통 업태가 있다. 바로 온라인 채널들이다. 현재 온라인 채널이 전체 소매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내외에 그치지만 그 성장세는 무섭다. 업계 전문가들은 2020년대에는 전체 소매시장의 25%가 온라인 채널로 옮아갈 것으로 보고 있다.
온라인 채널의 강세는 백화점의 젊은 고객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정현석 롯데백화점 영업전략팀장은 “최근 오픈마켓, 온라인몰, 해외직구 등으로 쇼핑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30대 이하 젊은 고객의 백화점 방문이 계속 줄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의 올해 상반기 30대 이하 젊은 고객 비중은 50.9%로 집계됐다. 작년 평균(52.2%)보다 1.3% 포인트 적다. 뿐만 아니라 5년 전인 2010년(56.1%)과 비교하면 무려 5.2% 포인트나 줄었다. 연도별 30대 이하의 비중은 2010년 56.1%, 2011년 54.9%, 2012년 54.1%, 2013년 53.3%, 2014년 52.2%, 2015년 상반기 50.9% 등으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현대백화점도 30대 이하 고객 비율이 2010년 34.6%에서 2015년 상반기 33.8%로 약 1% 포인트 떨어졌다. 30대 이하 젊은 세대의 백화점 이탈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이들이 최대 구매력 계층인 40∼60대가 됐을 때 백화점 매출은 곤두박질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백화점 관계자들의 한결 같은 고민이다.
◇새 옷 갈아입는 백화점들=닐슨코리아 유통서비스본부 김종근 국장은 “아울렛, 홈쇼핑, 면세점, 해외직구를 포함한 온라인몰 등 다양한 저가격채널로 소비자들이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타깃 맞춤화 전략’을 보다 강화하는 한편 기존의 전통적인 백화점 포맷 대신 쇼핑과 문화, 휴식 등을 함께 제공할 수 있는 복합상업 시설 형태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 국장은 이와 함께 온·오프라인 채널을 활발히 넘나드는 ‘옴니채널쇼퍼’를 위한 쇼핑의 편의성과 가격경쟁력 증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화점들은 벌써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2013년 신세계 센텀시티(부산)점 9층에 백화점 최초로 옥외 테마 파크 ‘주라지’를 조성했다. 3960㎡ 규모에 탐험, 놀이, 휴식을 테마로 회전목마 등 놀이시설을 갖춰 고객들이 즐기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신세계백화점은 내년 완공 예정인 동대구점에도 스카이파크를 마련할 계획이다.
2013년 갤러리아백화점 ‘고메이 494’를 시작으로 백화점들이 경쟁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그로서란트’는 온라인에선 결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 주고 있다. 슈퍼마켓(grocery)과 식당(restaurant)을 합친 개념인 그로서란트는 식재료를 사 즉석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고 방금 먹은 음식의 재료를 구입할 수도 있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남성전문관 ‘현대 멘즈관’ 등 백화점들은 그동안 주고객층이 아니었던 남성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전용 공간을 앞다퉈 열고 있다.
무엇보다 백화점들이 공을 들이는 것은 모바일을 활용한 서비스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4월부터 행사 정보 및 사은행사 내용, 이벤트 등을 언제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 쿠폰북’앱을 선보였다. 또 지난해 11월부터 본점에서 업계 최초로 ‘스마트 비콘서비스’를 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 고객의 위치에 따라 행사정보 제공, 할인쿠폰 증정 등 다양한 쇼핑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6월부터 SK플래닛의 ‘시럽’ 모바일 앱 서비스와 제휴를 맺고 업계 최초로 현대백화점 모든 점포에서 ‘U멤버십’ 쿠폰 존(지역)을 운영하고 있다. 쿠폰 존을 지날 때마다 자동으로 회원 스마트폰으로 할인 쿠폰 등이 전송되는 방식이다. 신세계백화점도 ‘엄마,아빠도 편하게 쓰는 앱(APP)’을 21일 출시한다. 26일부터는 온라인에서 구매한 뒤 매장에서 상품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매직픽업 서비스’도 시작한다. 이제 백화점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재미있게 놀고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대표적인 오프라인 매장이지만 온라인·모바일 등 다양한 채널을 결합한 옴니채널 서비스로 좀더 편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진화하고 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
[경제 히스토리] “젊은 고객 잡아라” 85살 먹은 백화점 이유있는 변신… 진화하는 ‘유통의 꽃’
입력 2015-08-21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