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첨함에서 ‘1’자가 선명한 갈색 번호표가 뽑혀 나오는 순간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서울 양천구 서서울호수공원에서 최대 5년간 합법적으로 푸드트럭을 운영할 영업권이 달린 번호였다. 18일 서울 마포구 서부공원녹지사업소에는 20대 청년, 40대 아주머니, 70대 할아버지, 세 살 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부부 등 13명이 모여 추첨을 지켜봤다.
◇단속 걱정 없이 장사하고 싶어서=행운은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푸드트럭에 젊음을 걸어보려는 사촌 형제에게 돌아갔다. 동생 김인순(28)씨는 양식조리사 자격을 가진 요리사다. TV 속 스타 셰프는 남의 이야기였다. 8년간 네 번이나 식당을 옮겨야 했다.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다 지난해 8월 결국 조리모를 벗었다.
형 민순(31)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디자인 회사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일했다. 해외 디자인 대회에서 상을 받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박봉에 산더미 같은 일감뿐이었다. 지난해 정부가 푸드트럭 합법화 방침을 발표하자 민순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던 기아자동차 ‘레이’를 개조해 직접 푸드트럭을 제작했다.
민순씨는 “추로스(막대 모양의 튀김과자)와 커피를 팔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에야 아무 곳에서나 장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곳에 트럭을 세우고 영업을 시작했다. 썩 잘됐지만, 언제 단속에 걸릴지 몰라 늘 불안했다.
민순씨는 동생과 함께 서울시가 공모한 서서울호수공원 영업권 추첨에 응모했고, 당첨의 행운을 잡았다. 형제는 3년간 이 공원에서 푸드트럭 영업을 보장받고 추가로 2년 연장할 권리도 얻었다. 지난해 10월 공원 내 푸드트럭 영업이 가능해진 이후 서울의 공원에서 푸드트럭이 운영되는 첫 사례가 됐다. 동생이 요리를, 형이 운영을 맡을 계획이다.
◇내 소원 풀어줄 푸드트럭은 언제쯤=공모에 참여한 13명의 사연에는 우리 사회의 경제상이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서울시는 청년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청년과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원 자격을 제한했다. 13명 중 29세 이하 청년이 8명, 기초생활수급자가 5명이었다. 최연소인 강민규(23)씨는 서울 강북구 대학교 앞에 포장마차를 열어 주먹밥을 팔았다. 근처 상인과 마찰이 생겨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합법적인 장사를 해보고 싶어서” 응모한 경우였다.
박준서(31) 서은진(28·여)씨 부부는 세 살 아들 찬우를 안고 달래가며 추첨 순서를 기다렸다. 박씨는 지난 4월 8년간 다닌 중견기업을 그만뒀다. 17개월 된 딸을 포함해 네 식구를 부양하기엔 월급이 빠듯해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 것이다. 박씨는 “공기업이나 대기업이면 계속 회사를 다녔겠지만 그런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했다.
두 대학생의 어머니인 김미숙(48·여)씨는 “아이들 학자금 대출 2000만원을 갚으려고 푸드트럭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는 “장사를 하려 해도 임대료와 권리금을 감당하기 어렵다. 푸드트럭은 1년에 토지임대료 6만8700원만 내면 돼서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윤봉수(73)씨는 목발을 짚고 추첨장에 들어섰다. 10년 전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됐다. 건설현장 일용직 인부였는데 더 이상 공사판에 나갈 수 없었다. 아내와 함께 지하철역 인근에서 떡볶이 노점을 꾸려 나갔지만 구청 단속 때문에 지난해 8월 접어야 했다. 지난 1년간은 파지를 주우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윤씨는 “당첨돼도 걱정”이라며 “푸드트럭을 마련하려면 3000만원 넘게 든다는데 어떻게 마련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첨되지 않았다.
◇정부 호언장담과는 달리=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끝장 토론에서 규제 개혁 대상 1호로 꼽은 뒤 푸드트럭은 현 정부 규제완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후 정부는 푸드트럭을 합법화해 일자리 6000개를 창출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현재 전국에서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푸드트럭은 고작 33대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같은 문화시설에서도 푸드트럭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식품위생법 시행규칙 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고 18일 밝혔다. 효과는 미지수다. 주변 상권의 반발을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다. 시에서 푸드트럭 영업자를 뽑겠다며 나섰지만 대상지는 공원 내 매점이 없고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서서울호수공원 한 곳뿐이었다.
지정된 장소에서만 영업해야 하는 터라 푸드트럭은 발이 묶인 셈이 됐다.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푸드트럭 연착륙을 위해 노력하겠다”면서도 “주변 상권과의 마찰 때문에 활성화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꿈 실은 푸드트럭… 아직은 ‘좁은 문’
입력 2015-08-19 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