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낙산(駱山)의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종로구 창신동.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인근 동대문시장에 옷을 공급하는 봉제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이 봉제골목이 새 옷을 입고 있다. 골목 곳곳에 화단이 생겨 화사함을 뽐내고, 삼삼오오 앉아 노닥거릴 수 있는 쉼터도 들어섰다. 사회적기업이 예쁜 간판을 만들어 공장마다 배포했고, 마을라디오가 날마다 사소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런데 달라진 겉모습만큼 이 골목에서 일하는 이들의 삶도 나아졌을까.
2012년 서울시와 종로구가 마을공동체 사업에 나서면서 골목의 풍경은 바뀌기 시작했다. 창신동 일대는 지난해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도시재생선도지역으로 선정됐다. 봉제공장이 밀집한 창신2동 647번지 일대는 박물관 거리로 조성돼 창신동과 봉제산업 역사를 알린다.
원단을 나르는 오토바이 소리로 시끄럽던 골목은 요즘 관광객 목소리가 더 크다. 카메라를 손에 쥔 이들이 무리지어 골목을 지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재봉틀이 쉴 새 없이 돌아가던 공장 건물에 카페 간판이 걸리기도 했다. 16일 이 골목을 찾은 박모(30)씨는 “봉제공장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이 인상적”이라며 “서촌이나 북촌 못지않게 볼거리가 많은 동네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평화시장을 거쳐 창신동에서 20년 넘게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는 김모(62·여)씨는 창신동에 봉제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1970년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봉제공장 근로자들은 ‘변화’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 김씨는 작업용 탁상에 두 팔을 기대고 웅크려 앉은 채 재봉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비좁은 공장에선 드르륵 드르륵 박음질 소리만 울렸다. 환풍기 2대가 부지런히 돌아갈 뿐 창문은 없다. 옷감에서 나오는 먼지는 매일 닦아내도 금세 쌓인다.
김씨는 1967년 전북 진안에서 상경했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보조원(시다)으로 첫발을 들였다. 재봉사(미싱사)와 보조를 맞춰 원단을 건네고 다림질을 했다. 잔심부름도 도맡았다. 오전 8시에 출근해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격주 일요일에만 쉴 수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피복공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에도 김씨의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김씨는 “일감이 있는 대로 일해야 돼 평화시장 시절보다 더 오래 일하는 것 같다”며 “매주 일요일 쉴 수 있게 된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오랜 시간 일하다보니 여기저기가 아프다. 그는 “눈이 침침해져서 돋보기안경을 써야 되는데 오랫동안 안경을 쓰고 일하려니 어지럽다”며 “매일 같은 자세로 12시간 넘게 앉아서 일하다 보니 가만있어도 엉치뼈가 아프다”고 했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지난달 21일 발표한 ‘봉제산업 노동자 건강안전 실태와 작업환경’ 보고서는 봉제골목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봉제산업 종사자 466명을 대상으로 설문했더니 62.8%가 허리통증, 74.1%가 어깨·목·팔 등의 근육통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63%는 호흡기 질환을 앓았다. 제대로 환기가 되지 않는 공장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로 장시간 앉아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일한 탓이다. 22.3%는 염색약품 때문에 피부염을 앓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정이 이렇지만 영세한 봉제공장이 자체적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는 어렵다. 도시 정비와 더불어 봉제골목 근로자의 노동환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따르는 이유다.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주5일 근무제가 자리를 잡아가도 봉제골목엔 토요일이 없다”며 “재생도시라며 공장에 간판 달고 화단을 가꾸지만 정작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환경, 임금 문제 등을 지나치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 사무총장은 “봉제공장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작업 환경을 갖춘 모델하우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기획] ‘동대문 패션산업 생산지’ 가보니… 주변환경 현대화됐지만 노동환경은 ‘전태일 시대’
입력 2015-08-17 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