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시대의 거울이다. 광복 이후 우리 가요를 돌아보는 일은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과 다름없다. 1945년 광복 이후 오늘까지 가요는 역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우리 곁을 지켜온 위로였다.
광복과 전쟁을 치른 우리의 40, 50년대는 고향의 포근함과 희망을 담은 노래들이 사랑을 받았다. 물론 당시에도 일제를 찬양하는 노래들이 무수히 강요됐다. 광복을기뻐한 노래도 쏟아졌다.
손석룡의 ‘귀국선’과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은 1948년 히트곡이 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학수고대했다. 1953년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는 실향의 아픔과 전쟁의 상처를 눈물로 담아냈다.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 노래들은 아직도 사랑받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삼팔선의 봄’ ‘꿈에 본 내 고향’ 역시 분단으로 인한 고향 상실을 담은 노래들로 애환을 함께했다. 당시 가요는 한국전쟁 이후 가속화된 재건의 분위기를 담아냈다.
50년대 중반 명국환의 ‘아리조나 카우보이’와 백설희의 ‘샌프란스시코’는 사회적으로 미친 미국의 영향을 가늠케 하기도 했다. 이 열기는 한명숙이 부른 ‘노란샤쓰의 사나이’로 이어졌다. 1968년 포크 자작가수 한대수의 노래와 이듬해 클리프 리처드 내한 공연은 70년대 음악의 변화를 예고했다.
청바지 문화로 대변됐던 70년대는 트로트 장르에서 포크와 밴드 음악으로 급변했다. 송창식의 ‘왜 불러’, 이장희의 ‘그건 너’, 김민기의 ‘아침이슬’, 신중현의 ‘미인’은 파격 그 자체였다. 청년문화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저항의 물결은 금지곡을 양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80년대에 조용필, 90년대엔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를 장악했다. 아이돌 그룹이 탄생히면서 가요는 혁혁한 변화로 아시아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싸이가 빌보드 차트를 넘보면서 한류는 허상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광복 70년, 우리 가요는 국민과 함께한 둘도 없는 친구였다.
강태규(대중음악평론가·강동대 교수)
[문화공방] (16) 가요로 본 광복 70년
입력 2015-08-17 00:10 수정 2015-08-17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