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승주] 롯데를 다시 생각한다

입력 2015-08-17 00:20

2015년 7월 27일, 장남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일본행 전세기에 몸을 실었다. 작전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아버지의 ‘손가락 지목’으로 멀쩡한 이사들이 해임됐다. 이렇게 갑자기 해임된 이사 중에는 차남도 있었다. 다음 날 차남의 반격이 시작됐다. 손가락 해임은 무효라며 이사회를 열어 전날 일은 모두 없던 일로 돌렸다. 그뿐 아니다. 아버지를 아예 제명시켜버렸다. 장남의 ‘쿠데타’가 하루 만에 진압되고, 차남이 아버지를 내치는 ‘막장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됐다. 한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 이야기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 삼부자는 몰랐을 것이다. 볼썽사나운 ‘집안싸움’이 반(反)롯데그룹 정서로 이어져 대대적인 롯데 불매운동이 벌어질지. 대기업 개혁 이야기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던 여당이 스스로 재벌개혁법안을 내놓으며 지분구조에 대해 캐물을지. 그리고 급기야 한·일 롯데그룹을 장악한 신동빈 회장이 공항 사과에 이어 다시 한번 대국민 사과를 하며 90도로 머리를 숙이게 될지.

그러나 신 회장의 사과는 반롯데 정서를 추스르고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인 듯 보인다. 그룹의 정체성 논란에 그는 ‘한국어 기자회견’이라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신 회장은 “롯데는 한국기업”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발음에서 일본어의 흔적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니므니다’ ‘파센트(%)’ ‘에르(L)’ 등 일본인이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운 듯한 발음은 치명적이었다. 13만 한국 직원을 이끄는 회장이 한국어를 잘 못하는 것은 이번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가 함축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머니가 일본인인 신동주·동빈 형제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대학까지 마쳤다. 신 회장의 아내는 일본 재계 명문가의 딸이다. 여전히 일본 국적을 갖고 있는 아들은 올해 초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병역도 민감한 사안이다. 형제는 한·일 이중국적을 갖고 있다가 병역 책임이 만료된 후 한국 국적을 선택했다. 신격호 총괄회장부터 3대에 걸쳐 병역을 기피했다. 이들이 한국에 대한 애정이 더 있었다면 언어나 병역 문제는 다르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지분 구조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한국 롯데의 지주회사격인 호텔롯데 지분은 일본 측이 99%를 갖고 있다.

이쯤 되면 묘한 배신감이 든다. 우리는 롯데 껌을 씹고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으며, 뻔한 상술인줄 알면서도 11월 11일에는 빼빼로를 샀다. 롯데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롯데월드에 놀러갔다. 당연히 한국기업이라 생각했는데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기업 투명성도 문제다. 롯데가 직원조차 알지 못하는 ‘깜깜이 지배구조’이고, 호텔롯데는 주식시장에 상장조차 안 됐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한다.

신 회장은 사과를 했고, 개혁안을 내놓았다. 호텔롯데를 상장하고, 기업 투명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치러야 할 비용이 7조원에 이른다니 만만치 않다. 그럴수록 적극적인 실천 의지가 중요하다. 대국민 사과가 반롯데 정서를 일단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마침 롯데 경영권 분쟁의 향방을 결정할 롯데홀딩스 주주총회가 일본에서 오늘 열린다. 서울이 아니라 도쿄에 모인 일본 이사진의 마음을 잡는 이가 롯데그룹 경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것,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승주 산업부 부장대우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