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20·끝) 윌리엄 스크랜턴의 남은 사역

입력 2015-08-18 00:26 수정 2015-08-18 18:49
윌리엄 스크랜턴은 마지막 여생을 일본에서 보냈다. 1922년 별세할 때까지 그가 살았던 고베 집 외관(왼쪽). 그의 별세 소식은 일본에서 발행되던 ‘The Japan Advertiser’ 3월 26일자에 실렸다. 이덕주 교수 제공

1909년 메리 스크랜턴이 별세하면서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사실상 서울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됐다. 그럼에도 그는 어머니 장례 후 8년을 더 한국에 머물며 일했다. 그 역시 개척선교사로서 사명감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머니가 남긴 한국 사랑에 대한 뜻이기도 했다. 대한의원 촉탁의사 겸 의학교 교수, 의료선교사협회와 요양원 사역은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요양원 사역에 마지막 힘을 쏟다

스크랜턴이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추진한 것은 요양원이었다. 어머니 별세 한 달 전인 1909년 8월 16일, 스크랜턴은 ‘The Korea Mission Field’ 편집자에게 ‘서울요양원’ 소개글을 보냈다. 선교사들이 건강을 잃기 전에 휴식을 취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며 요양원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실제로 당시 극동 아시아에서 일하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다 풍토병에 걸리며 즉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스크랜턴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가 세상을 떠난 헤론이나 홀, 셔먼, 샤프 등이 그러했고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턴도 그랬다. 어떤 의미에서 서울요양원 1호 환자는 어머니였던 셈이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서울 상동(달성궁)에서 서울요양원을 차리고 본국 시설에 뒤지지 않는 최고 시설로 꾸미려 했다. 요양원은 ‘외국인 전용’으로 운영했다. 이는 요양원을 여전히 ‘선교사를 위한’ 사역으로 봤기 때문이다. 풍토병에 걸려 사역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에 굳이 본국으로 후송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치유하고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양원 사역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11년 3월 스크랜턴은 평북 운산에 있는 미국인 금광회사 부속병원으로 가야 했다. 당시 운산 금광 부속병원에는 남장로회 의료 선교사였다가 사직했던 놀란이 전속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휴가를 얻어 귀국하면서 스크랜턴에게 금광 부속병원 일을 부탁했던 것이다. 운산 금광은 1903년부터 금을 생산하면서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몰렸고 외국인 기술자만도 70명이 넘었다. 그러다보니 다친 노동자나 금광회사 직원 가족을 위한 의사가 필요했다.

스크랜턴으로서는 요양원 사업이 자리를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 장기간 서울을 떠나 있어야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금광 부속병원 사정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요양원 일을 부인에게 맡겨두고 운산으로 떠났다. 자연히 그가 서울에서 맡았던 소소한 사역들은 중단됐다. 의료선교사협회 일도 후배 선교사에게 넘겨주었고 상동교회 사역에서도 손을 뗐다. 그렇다고 ‘믿음의 아들’ 전덕기 목사와 관계마저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관계는 더 돈독해졌고 전 목사가 결핵에 걸리자 운산까지 데려다 치료했다.

부속병원 1년 계약기간이 끝나자 다시 서울로 돌아온 윌리엄 스크랜턴은 요양원 사역을 본격 추진했다. 그러면서 사업 내용을 병원으로 바꾸었다. 달성궁 부지 안에 있던 3층짜리 요양원 건물을 병원 시설로 개조하고 1912년 12월부터 ‘시란돈병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시작했다. 그는 개인병원을 시작하면서 ‘전반의 치료원을 복설(復設) 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1885년 설립했던 ‘시병원’을 그 연원으로 두었다.

스크랜턴이 ‘시란돈병원’을 정동 시병원의 연속으로 본 것은 지금은 선교사 신분이 아니지만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가졌던 목적, ‘한국인을 위한 의료선교’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병원으로라도 자신이 한국에 온 목적인 의료선교를 지속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그는 본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로 사역하는 선교가 아니라 현지에서 사업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선교를 감당하는 일종의 ‘비즈니스 선교’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 같은 스크랜턴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크랜턴의 개인병원이 정부나 연합 선교부 재정 지원을 받는 당시의 대형병원(세브란스병원, 대한의원)들과 경쟁해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1년 만에 시란돈병원은 문을 닫았다.



일본에서 일생을 마치다

사업을 정리한 스크랜턴은 이번엔 충남 직산군(현 천안시)에 있던 직산 금광 부속병원의 초청을 받았다. 그리고는 1916년 중국의 항구도시 다롄(大連)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스크랜턴 가족은 다시 한국에 오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어머니, 아내와 함께 개척 선교사로 한국에 와 감리교 선교사 사역 20년, 선교사직 사임 이후 개인 사역 10년 등 총 30년의 한국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을 떠났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스크랜턴이 왜 다롄으로 가게 됐는지, 가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다롄에는 각국 외국인들이 상당수 거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외국인 전용병원에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당시 첫째 사위가 중국 심양의 영국 영사관에서 근무했고 둘째 사위도 다롄 미국영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중국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1년 후엔 일본 고베로 거주지를 옮겼다. 다롄처럼 외국인 전용병원의 초빙을 받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베에서의 생활은 조용하고 단순했다. 1919년부터 외국인 거주지의 2층 양관 주택을 마련해 별세하기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베국제병원 자문의사 일을 시작했고 미국 고베영사관 자문의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그는 1921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1년여를 장기 투병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사위 커티스가 공금횡령 혐의로 미 정부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됐고 그 과정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스크랜턴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한 달 뒤인 1922년 3월 23일, 고베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노블 선교사는 나중에 스크랜턴의 별세 소식을 이렇게 증언했다. “마지막 유언을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그는 죽음을 그렇게 엄청난 사건으로 보지 말라는 듯이, ‘죽음이란 마치 이쪽 방에서 저쪽 방으로 문을 통해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