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서 꿈 찾은 다문화 소녀… 안산 구세군다문화레전드FC 김혜리 양 “제2 지소연 될래요”

입력 2015-08-18 02:04
‘제2의 지소연’을 꿈꾸는 김혜리가 지난 14일 경기도 안산시 원곡중학교에서 배승현 구세군다문화레전드FC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드리블 훈련을 하고 있다.
구세군다문화레전드FC의 초등부 선수들이 무더위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미니게임을 하고 있다.
다문화가정과 결손가정, 저소득층 유소년으로 구성된 구세군다문화레전드FC 선수들이 훈련에 앞서 한데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지난 14일 오후 6시 경기도 안산시 원곡중학교. 아직도 햇살이 따갑다. 김혜리(11·화랑초)는 축구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맨다. 오늘도 오빠들을 제치고 골을 넣겠다고 다짐하면서. “더 빨리 공격해!” 감독의 호통 소리에 혜리는 치타처럼 날쌔게 그라운드를 누볐다.

혜리는 2년 전만 하더라도 무력증에 빠져 있던 다문화가정 소녀였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 TV를 끼고 살았다. 어머니가 필리핀 출신인 혜리는 친구들이 피부가 검다고 놀리면 화가 났다. 세상은 그렇게 답답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다.

7세 때부터 놀이터에서 동네 오빠들과 공을 차던 혜리는 지난해 겨울부터 무료로 운영되는 구세군다문화레전드FC(구세군다문화FC)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면서 삶이 달라졌다. 꿈이 생긴 것이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 행복해요. 예전엔 내가 뭘 잘하는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축구를 하면서 나도 뭔가 잘하는 게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혜리의 소원은 롤 모델 지소연(24·첼시 레이디스)처럼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다. 혜리는 최근 중국 우한에서 끝난 동아시안컵에서 한국 여자 대표팀이 3차전에서 북한에 졌을 때 속이 많이 상했다.

구세군다문화FC는 다문화가정(12개국)과 결손가정, 저소득층 유소년으로 구성된 팀이다. 배승현 감독과 최혁수 구세군 안산다문화센터장이 손을 잡고 2013년 7월 창단했다. 당시 유니폼을 맞출 비용도 없었을 만큼 어려움이 컸다. 재정적으로 어렵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3년 구세군자선냄비본부의 지원을 받았고 지난해엔 삼성꿈장학재단의 도움으로 운영됐다. 올해에는 경기도청으로부터 강사료와 운영비를 지원받고 있다. 현재 70여 명의 학생들은 초등부와 중등부로 나뉘어 주 2회(금요일·토요일) 원곡중학교 운동장에서 훈련한다.

혜리에겐 고민이 하나 있다. 중학교에 가서도 축구를 계속하고 싶은데 엄마가 반대하는 것이다. 어려운 형편에 뒷바라지를 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엄마는 마음이 아프다. 최근 혜리는 인천의 한 중학교 감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배 감독은 혜리의 장래성을 높이 샀다. “재능은 물론 근성과 승부욕도 타고났습니다. 부모님이 허락한다면 선수로 키워 보고 싶은 아이입니다.”

배 감독은 재능이 뛰어난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축구선수의 꿈을 접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 아이들이 축구선수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위에서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힘이 나죠.”

배 감독은 최소한의 경비를 지원받으며 구세군다문화FC를 지도하고 있다. 그마저도 훈련을 돕는 두 코치에게 나눠 준다. 그는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안산은 다문화가정이 많은 도시입니다. 그런데 다문화가정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은 높지 않았어요.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소외감과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축구를 통해 아이들이 어긋나지 않고 바르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축구 기술보다 인성교육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요.”

구세군다문화FC의 활동이 조금씩 알려지자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 인천 유나이티드의 전·현직 선수들이 재능기부에 나섰다. 이들이 만든 ‘아미띠에(Amitie·프랑스어로 우정이란 뜻)’란 봉사단체는 2013년 12월 자매결연을 했다. ‘아미띠에’ 회원들은 비시즌 구세군다문화FC 선수들을 찾는다. 지난 겨울에는 서울 용산 현대아이파크몰 풋살장에서 함께 공을 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구세군다문화FC는 같이 훈련하는 시간이 많지 않아 전력이 약한 편이다. 지난달 24일부터 29일까지 경남 남해군 일원에서 펼쳐진 ‘2015 MBC 축구 꿈나무 여름대축제’ 15세 이하 부문에 출전했다. 다른 대회는 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아이들이 등록조차 할 수 없었는데, MBC꿈나무축구재단의 배려로 전국 규모 대회에 처음 나가게 됐다. 경기도청과 한국얀센의 후원을 받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최 센터장은 대회 참가를 위해 사비까지 들였다. 그러나 결과는 5전5패.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다른 유소년 팀과의 전력 차를 실감해야 했다.

하지만 배 감독은 이 대회에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2차전에선 우리 선수들이 긴장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경기에선 정말 잘했습니다. 특히 알렉세이는 펄펄 날더군요. 퇴장을 당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좋은 선수라고 칭찬이 자자했죠.”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인 알렉세이(17·원곡중)는 아직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시합에서 져서 화가 많이 났어요. 다음에 만나면 꼭 이길 겁니다.”

알렉세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 봤다. “메시처럼 세계적인 축구스타가 되는 거예요.”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구세군다문화FC는 혜리와 알렉세이에게 꿈을 가꾸는 곳이었다.

안산=글·사진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