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진애] 영화 ‘암살’의 울림이 크다

입력 2015-08-17 00:20

광복 70주년에 본 영화 ‘암살’의 울림이 크다. 꿈에 자꾸 나온다. 마지막 장면의 뭉클했던 모습이 나타나고, ‘대한민국 만∼세’ 하면서 사진을 찍던 아련한 미소가 떠오르고, 무거운 총을 들고서도 오직 목표만을 향했던 서늘한 눈매가 나타난다. 서울역 안에 일장기가 가득 걸린 장면에 깜짝 놀라고, 모든 시민이 차렷 경례하는 장면에 기가 막히고, 어린 소녀에까지 총질해대는 군인의 모습에 울부짖다가 깬다.

자료를 자꾸 찾아보게 된다. 의열단 김원봉 단장은 새삼 주목하게 됐다. 백범 김구 선생보다 무려 3만원 더 높은 8만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니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항주 시절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야기는 잘 몰랐는데, 실제로 일제의 눈을 피해 운하의 배를 타고 다니며 잠적하곤 했다는 김구 선생의 일화가 있었다.

나라를 잃어도 오직 개인의 입신영달을 꿈꾸는 천인공노할 ‘강인국’ 같은 사업가가 어디 한둘이었을까. 일본에게서 작위 호칭을 받은 작자들만도 백명이 넘는 데 말이다. 동족을 밀고하던 ‘염석진’ 같은 악질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일제에 붙었다가 잽싸게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에 붙어서 반민특위에서 풀려났을 뿐 아니라 경찰과 정부에서 한 자리, 한 재산 차지하고 애국 행세했던 친일파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영화 속 염석진의 궤변이 반민특위에서 실제로 나왔던 변명들이었다는 사실도 끔찍하다.

영화의 힘은 크다. ‘암살’은 영화적 재미가 가득하면서도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웃음 속에서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문하게 만든다. 왜 우리는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했을까. 왜 우리는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지 못해 왔을까. 왜 우리는 이런 역사를 잘 몰랐을까.

그 아픈 역사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영화 ‘암살’을 만들었다는 것이 희망을 품게 한다. 영화 속 배경인 1930년대는 3·1운동 후 나라의 독립이 요원할 것이라는 패배주의가 팽배했던 시대다. 그 절망의 시대에 ‘알려야지,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하고 믿으며 활동했던 이름 모를 독립운동가들의 희망을 다시 떠올린다.

김진애(도시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