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본 노동개혁] ‘非’자만 붙었을 뿐인데… 정규직의 ‘乙’ 신세

입력 2015-08-17 02:26
잡지사에 다니던 이모(25·여)씨는 1년8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계약직 사원으로 들어간 탓에 언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을지 몰라 미리 회사를 옮긴 것이다. 높은 업무 강도도 이직 결심을 부추겼다. 이씨는 주 6일 근무를 했다. 야근이나 주말근무수당도 없이 새벽 2∼3시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날이 계속됐다. 통장에는 월 145만원이 찍혔다. 정규직 사원들이 대체휴일을 받아 쉬는 날이면 끝없는 박탈감이 밀려 왔다.

이씨는 “잡지 업계에선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100만원도 못 받고 일하는 계약직 사례가 허다하다. 정규직보다 일은 더 많이 하는데 임금은 고사하고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너도나도 대기업·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 장기 불황에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자 ‘안정적 고용’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첫 직장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면 평생 그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청년들의 인식이다.

작은 기업에서 계약직으로 경력을 쌓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몸값을 올리면서 큰 회사로 이적하는 ‘미국식’ 고용시장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기업들은 비정규직을 ‘우리 식구’가 아닌 그냥 ‘쓰고 버리는’ 존재로 취급한다. 비정규직의 비참한 현실은 젊은이들을 정규직·대기업·공무원이라는 ‘바늘구멍’으로 내몰고 있다. 악순환의 고리가 고착화되면서 청년실업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비(非)’자만 붙었을 뿐인데=정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은 다소 사정이 낫지만 고용 불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공공기관 비정규직에 취직한 김모(25·여)씨는 1년 계약직이다. 1년이 지나면 재계약을 해야 한다. 김씨는 “몇 년 전에는 비정규직으로 오래 근무한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채용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신분이 바뀌려면 따로 공채 시험을 봐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시험을 치러 입사하면 기존 비정규직 경력은 인정받지 못한다.

정부 공식 집계로도 비정규직은 지난해 600만명을 돌파했다. 16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비정규직 근로자는 601만2000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32%를 차지한다. 비정규직 규모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지만 임금 등 처우는 여전히 열악하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4월 ‘2014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비정규직의 시간당 평균 임금이 1만1463원으로 지난해보다 1.8% 상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저임금의 영향을 많이 받는 단시간근로자 외에 기간제근로자, 파견근로자, 용역근로자 등은 오히려 지난해보다 임금이 줄었다.

고용부 관계자는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표면적으론 비정규직 임금이 높아졌지만 양질의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비정규직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해마다 상승 추이가 둔화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같은 기간 정규직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1만8426원으로 5.1% 증가했다.

◇무시는 기본, 협박·폭행까지=적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환경 외에도 비정규직은 차별대우와 무시에 항상 노출돼 있다. 가해자는 정규직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이 하나의 계급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씨는 “커피 심부름은 항상 내 몫이다. 배달 음식을 시켜먹으면 뒤처리도 해야 한다”며 “정규직이 짐 옮기기 등의 일을 ‘종 부리듯’ 시킬 때마다 화가 나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둘 때 한 정규직 직원에게 ‘어디 잘되나 보자’는 협박에 가까운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엄청난 업무량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월급을 버티다 못해 퇴사하는 건데 막말을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 6월 발표한 ‘업종별 직장 괴롭힘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비율은 정규직이 12.4%인 반면 무기계약직은 17.7%, 비정규직은 22.2%였다. 고용이 불안정할수록 피해를 경험한 비율이 높은 것이다.

괴롭힘의 종류는 ‘사직 종용’이 가장 많았다. 의견 무시, 모욕이 뒤를 이었다. 서울시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실태를 조사한 서유정 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은 “개별 공무원에게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급여 수준을 결정할 권한이 없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등 복종을 강요하는 경우까지 있었다”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착화된 ‘갑을관계’를 꼬집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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