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광복 70년-윤동주·본회퍼·김교신을 기림

입력 2015-08-17 00:03

광복 70년 잔치는 끝난 듯 끝나지 않았다. 15일 이런저런 행사가 마무리돼 대단원의 막이 내린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광복의 가치 실현은 진행형이어야만 한다. 오히려 우리는 매일같이 옷깃을 여미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다.

이에 70년 전 온몸으로 광복을 꾀하다 죽음에 이른 세 분을 소개한다. 시인 윤동주(1917∼45),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45), 무교회주의자 김교신(1901∼45)은 조국을 죽음의 길로 몰아가는 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하나같이 치열했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4학년 때 쓴 ‘십자가’다. 서정성 넘치는 그의 시어엔 비장함이 담겼다. 그악스러운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그의 고백적 의지가 가슴을 친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는 43년 일본 도시샤대학 재학 중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돼 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병사했다. 한때 문학계엔 그가 일제의 과잉단속에 걸려 불운의 희생을 당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죄목은 분명 ‘조선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순교였다. 비록 죽음으로밖에 주장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의 순교는 새 세계를 갈급해온 희망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분단을 뛰어넘어 온전한 광복을 꿈꾸어야만 하는 이유다.

다음으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정면으로 저항한 본회퍼의 열정은 윤동주 이상이다. 대대로 학자 집안으로 이른바 상류층 출신의 본회퍼는 약관 21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24세에 교수자격 시험에 통과할 정도로 뛰어난 배경과 능력을 갖췄는데도 거침없이 히틀러 암살계획에 직접 뛰어들었다.

31년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히틀러의 악마적이고 배타적인 폭압정치의 문제를 일찍부터 지적했다. 그 때문에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가택연금, 발언금지 조치까지 받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그의 의지는 꺾일 줄을 몰랐다. 그는 교회가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그는 43년 4월 체포돼 45년 4월 9일 교수대에 섰다. 실천하는 양심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의 행보는 이후 세계 교계에 큰 가르침을 주었다. 늘 약함을 앞세우고 눈앞의 상황만을 되뇌며 주저주저하는 우리에게 절실한 결단을 몸으로 친히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무교회주의자요 ‘성서조선’의 편집인 김교신의 죽음은 앞의 사례와 조금 다르다. 무교회주의는 교권이나 교회보다 하나님과 성서를 중시하자는 대안적 공동체운동이고, ‘성서조선’은 시종 조선산 기독교인의 성서 중시를 주제로 삼은 잡지다. 조선총독부는 김교신이 쓴 ‘부활의 봄’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함)’ 등을 반체제적인 내용이라고 문제 삼아 42년 성서조선을 폐간하고 김교신을 1년 동안 감옥에 처넣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김교신은 44년 7월부터 흥남질소비료공장 조선인근로자 사택의 책임자로 일하며 그들을 이끌었는데 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에 걸린 한 근로자를 간호하다 죽음을 맞았다. 훗날 김교신이 일본 기업에 부역한 게 아니냐는 비난도 나오지만 그의 생각은 각별했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일상으로 돌아와 배우고 준비하면서 흔들리지 말고 장래를 도모하자는 뜻이었다. 그의 죽음을 단순한 병사로 볼 수 없는 까닭이다.

광복의 가치는 아직 다 이뤄지지 않았다. 분단도 여전하고 사회적 혼란과 불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윤동주 본회퍼 김교신의 죽음은 우리에게 선한 저항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말하며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