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희 CJ 명예회장 별세] 삼성家 ‘비운의 황태자’… 경영권서 밀려나 이국서 삶 마감
입력 2015-08-15 02:03
14일 별세한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비운의 황태자’로 불린다.
이 명예회장은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3남5녀 중 장남으로 193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최고 재벌가의 장남이면서도 경영 일선에서 배제되면서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고, 끝내 이국땅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호암은 장자지만 경영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일선에서 배제시켰다는 입장이지만 이 명예회장의 주장은 다르다.
호암은 1986년 펴낸 자서전에서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되어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밝혔다. 이에 이 명예회장은 1993년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6개월이 아니라 7년이었고,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몇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때 삼성을 운영했던 사람으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삼성에서 물러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며 삼성그룹에 미련을 보이기도 했다.
재계에선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때문에 부자지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으로 보고 있다. 1966년 삼성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서 사카린을 밀수한 사실이 폭로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호암은 2선으로 물러났다. 이후 이 명예회장은 한때 삼성의 총수 대행으로 나섰다. 10여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기도 했다. 호암이 당시 삼성의 참모진에게 ‘맹희 부사장에게 세 번을 요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게 가져오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장자 상속의 대원칙에서 삼성의 대권을 받은 그의 경영 행보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명예회장이 결정적으로 삼성가와 틀어지게 된 연유도 결국 한비 사건에 있었다고 한다. 한비 사건으로 차남 창희(1991년 별세)씨는 검찰 조사를 받고 구속됐고, 그는 수사망을 벗어났지만 2년 후 청와대 투서 사건이 불거지면서 투서의 주범으로 몰려 호암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호암은 이 명예회장이 한비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에 투서를 했다고 믿었고, 이 명예회장은 이후 급격히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십여년간 야인생활을 해야 했다.
1987년 호암 사후 그룹은 셋째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승계됐다. 이 명예회장은 개인적으로 제일비료를 설립해 재기를 꿈꿨으나 실패한 뒤 1980년대부터 계속 해외에 체류했다. 해외에서 삼성그룹과 무관한 삶을 살았던 그는 2012년 2월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유산분할 청구소송을 냈다. 장자로서의 권리를 되찾으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법원은 ‘상속회복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지났고 재산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이 명예회장은 이에 불복하고 항소했으나 2심에서 패한 뒤 상고를 포기했다.
소송 과정에서 이재현 회장 등 이 명예회장 자녀들과 CJ그룹 임원들이 항소와 상고를 만류했고, 범삼성가에서도 지난해 8월 횡령 등 혐의로 구속 기소 상태에 있는 이 회장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화해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인의 죽음이 삼성가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재계는 기대하고 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