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성섭] 카이로선언과 윤봉길 의사

입력 2015-08-15 00:20

70년 전 우리나라는 정말 가난했다. 35년 동안 일제에 의해 침탈당한 데 이어 광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화됐다. 그러나 불굴의 투지로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이라는 기적적인 성장을 이뤘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순국열사들의 역할이 컸다.

1943년 2차 세계대전 연합국들이 승리가 예상되면서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미국 영국 중국의 연합국 수뇌들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처리 문제 등을 다루는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회담’이다. 연합국들은 당시 한국을 일본의 통치에서만 벗어나게 하고 자기들이 공동관리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23일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쑹메이링(宋美齡) 부부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숙소에서 오후 8시부터 3시간 넘게 만나 한국을 독립국가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장제스의 11월 24일자 일기에는 루스벨트에게 한국 독립문제에 대해 ‘나의 주장에 찬동하고 도와 달라고 요구했다’고 적혀 있다.

이 만남 이후 루스벨트의 특별보좌관인 해리 홉킨스가 ‘가급적 이른 시기(at the earlest possible moment) 독립국가로 해방을 보장한다’는 초안을 작성했으나 루스벨트가 ‘적절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3국은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해방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란 테헤란에서 미국과 영국의 수뇌들은 소련의 스탈린과 회의를 갖고 카이로선언을 추인받았다.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최초의 약속이었다. 때문에 카이로선언이 최종 발표된 12월 1일을 국경일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이 또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6년 국문판으로 편찬된 김구 선생의 ‘도왜실기(屠倭實記)’ 서문에서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연합국의 동의를 얻은 이면에는 윤봉길 의사의 장거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에서 물통 폭탄으로 일본군 수뇌부를 일거에 제거하자 일본에 대한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쳤던 당시 중국인 4억명이 환호했고, 장제스가 카이로에서 그 은혜에 보답을 한 것이다.

장제스는 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애국지사들이 증언한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보면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전까지 우리의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전혀 돕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성공한 뒤에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금을 건네는 것은 물론 허난성 뤄양의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가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된 조국의 번영을 위해 목숨을 아까지 않았던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는 행사들이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청소년들이 순국선열의 나라사랑 정신을 제대로 배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 독립의 이정표인 카이로선언은 윤봉길 의사가 흘린 피의 대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성섭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