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학생 스스로 한 것처럼… 티 안나게… 탐구보고서도 ‘대필 시대’

입력 2015-08-14 02:12

지난 5일 오후 1시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상가의 카페. 대학원생 A씨가 가방에서 A4용지 1장을 꺼내 마주 앉은 여중생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그가 만들어줄 ‘탐구보고서’ 초안이었다. 이들은 여중생이 제30회 서울학생탐구발표대회에 제출할 탐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만났다. 서울시교육청이 주최하고 서울시과학전시관이 주관하는 대회는 현재 초·중·고 학교대회가 진행 중이다. 학교대회를 거쳐 서울시 예선·본선을 통과하면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다.

A씨는 150만원을 받고 모든 것을 ‘세팅’해주기로 했다. 2시간짜리 수업 4번에 재료 준비, 실험 계획부터 보고서 작성까지 책임진다. 학생은 A씨의 지도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는 지난 4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한 33회 과학탐구토론대회의 ‘탐구토론’도 지도했다. 아이디어도 A씨가 냈고, 보고서도 A씨가 썼다. 그가 맡은 학생들의 탐구보고서가 교내대회에서 상을 타자 학부모들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한번 입소문이 나니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강남과 목동의 학원가에서도 탐구보고서 수업이 인기다. 강남구 A학원의 고교생 탐구보고서 수업은 360만원이다. 3시간씩 8차례 수업하고 재료비는 별도로 내야 한다. 학원 홈페이지에는 “보고서 검토는 문제점과 보완사항을 알려주는 것이지 최종 논문을 완성해주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적혀 있다. 어느 정도 도와주는 걸까.

직접 학원 측 상담을 받아봤다. 학원 관계자는 “같이 보고서를 완성해준다.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교내 수상은 생활기록부에 올라가고, 대학 입시에도 관심 분야 연구를 진행했다고 적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강남구 B학원의 초등학생 대상 보고서 수업은 200만원이다. 3시간 수업을 4번 한다. 학원에서는 “너무 잘 쓰면 탈락하기 때문에 수준에 맞게 도와준다”며 “예전처럼 수능만 잘 봐서는 대학 가기 힘들다. 대학이 주도적 학습을 선호하는데 이제 초등학생 때부터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학원가에는 수업 없이 보고서만 작성해주는 이른바 ‘급행열차’도 존재한다. 보고서 대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티’를 내는 것이다. A씨는 학생 수준에 맞는 교과서 개념만 활용한다. 실험 과정은 반드시 학생의 신체 일부가 드러나게 찍는다. 학생이 직접 실험에 참가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촬영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이용하고 있다. 너무 좋은 카메라를 쓰면 어른 도움을 받았다고 의심 받을 수 있어서다.

적당히 잘 써서 1등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A씨는 “엄마들은 교내 대회 은상을 가장 선호한다”고 했다. 금상을 타서 다음 단계로 진출하면 준비할 게 많아지면서 시간을 빼앗기고 검증 받을 위험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은상은 수상 실적을 올리면서 검증을 피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공부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

각종 탐구보고서 대회에선 모집 요강에 학생이 ‘스스로’ 탐구 문제를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주최 측의 검증은 허술하다. 과학탐구토론대회는 학생 스스로 결과요약서의 ‘모든 연구는 참가 학생이 독자적으로 시행한 것입니까?’라는 항목에 답해야 한다. 학원가에서 탐구보고서 수업이 한창이지만 지금까지 ‘아니요’에 답하고 제출한 학생은 없다. ‘예’라고 표시하면 그만이다.

부정행위가 드러나면 수상이 박탈되지만 대필이 적발된 사례도 없었다. 서울학생탐구발표대회는 ‘출품자가 직접 창안·연구한 작품이 아닌 경우는 출품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하지만 접수단계에서 활용하는 표절검사 프로그램으로 대필 여부까지 밝히기엔 역부족이다.

대회 관계자들은 대필 의혹에 대해 “없는 얘기는 아니다. 서울과 대전 등 일부 지역에서 대필 관련 얘기가 들린다”며 “학원 개입 문제 등에 대해 곧 가이드라인을 정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많이 배운다”며 “학원 개입 등 일부 사례가 대회의 긍정적 취지를 해치지 않도록 더 준비하겠다”고 했다.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