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환 칼럼] 절름발이 노예 이야기

입력 2015-08-15 00:23

서기 55년경에 로마에서 노예로 태어난 절름발이가 있었다. 그는 가혹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인생은 멋지다’는 생각을 하면서 생명에 감사했다. 그는 억울하게 두들겨 맞고,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았다. 한편 많은 재산과 노예를 소유하고도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하던 그의 주인은 행복한 노예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는다. 주인은 절름발이 노예에게 행복해지는 법을 자기에게 가르쳐준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 노예는 주인에게 인간이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언한다.

“당신이 원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게 바로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보다 행복할 수 있을 것이요.” 주인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준다. 자유인이 된 그가 자신의 역경을 통한 삶의 철학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학파를 이룬다. 그가 바로 에픽테토스이다.

스토아철학은 세네카, 무소니우스, 에픽테토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를 ‘4대 현자’로 부른다. 세네카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고, 무소니우스도 명문 가정의 출신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는 당시 로마 황제였다. 그래서 더욱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그는 책을 남기지 않았으나 제자 아리아노스가 그의 어록을 여덟 권으로 기록하였으며, 대중을 위한 요약판을 편집하여 ‘삶의 안내서’라고 했다. 로마 병사들은 전선으로 떠나는 출정식에서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강한 영적인 교훈을 남겨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에픽테토스의 어록 중의 한 단락이다. “당신이 소유한 것은 신이 잠시 맡겨둔 것일 뿐 참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말하지 말라. 단지 그것을 되돌려준 것일 뿐, 당신에게 맡겨져 있는 동안 그것을 남의 물건인 듯 대하라. 마치 여행자가 하루 밤 숙소를 대하듯. 가진 것을 잃을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관을 말하는 듯하다.

‘월든’의 저자 H 소로가 혼란스러운 도시를 벗어나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인적이 드문 호숫가로 떠나는 계기도 에픽테토스 철학이었다고 한다.

하버드의대 정신과 교수 E 할로웰은 에픽테토스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인생은 멋지다’라는 생각을 기본자세로 삼으면 삶을 에워싸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대비할 수 있다. 세련된 지성인 가운데는 이런 생각을 어리석고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여기며 비웃는 이가 많지만,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의 삶과 교훈이 상징하는 것처럼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튼튼한 학문적 뿌리가 있다.”

그러나 에픽테토스 후에 스토아 철학은 곧 쇠퇴하게 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영향이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 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이 복음전파의 바탕을 마련한 셈이다. 당시 1세기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하여 라이트주립대학의 W 어번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스토아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은 가르침의 유사성 때문에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쟁에서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보다 우월했던 큰 이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생이었다. 기독교는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영생복락을 약속했다. 반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죽음 이후의 삶이 가능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대단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주제를 다루는 동서양철학의 고전으로부터 다양한 현대학문의 국내외 거성들의 강의에 청중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고, 사이버 공간을 달구고 있다. 어번 교수의 지적이 우리 세대에도 재현될 수 있을까. 행여나 해서 고개를 드니 아직도 무더운 한여름이다. 그래도 가을은 올 것이다.

김종환 (서울신학대학교 상담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