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며 발생한 분쟁을 계기로 투기성 자본으로부터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기업 경영에는 관심 없는 투기자본이 단기 시세차익 등을 노리고 경영권을 흔들 경우, 기업의 성장잠재력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 다수 주주들의 이익에도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기업에 대한 투기자본의 공격이 국가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다.
◇투기자본 소버린 공격에 SK그룹 전체 휘청=2003년 발생한 ‘소버린 사태’는 투기자본의 치밀함과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내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능력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소버린은 2003년 초 SK글로벌의 분식회계와 지배주주 구속으로 SK 주가가 폭락하자 그해 4월부터 약 20일 만에 SK 지분 14.99%를 확보해 2대 주주에 등극한다. 주식매입 비용으로는 1786억원이 소요됐다. 이후 소버린은 곧바로 현 경영진의 퇴진, 부실 계열사 지원 반대,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하며 경영에 직접 참여를 시도했고 SK의 경영권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SK 측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2004년 1월 자사주 매각, 지배구조 개선, 주주 관리 강화 등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해 주주총회에서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SK는 만신창이가 됐고, 소버린은 거대한 보너스를 챙겼다. SK의 경영권 분쟁과정에서 일부 해외펀드들은 SK에 위임장 지원 대가로 우선주를 매입해 소각하라고 요구했다. SK가 이를 수용해 우선주 매입에 나서자 우선주 가격이 보통주의 40% 수준에서 90%까지 급등해 1조원에 가까운 국부가 유출됐다.
SK가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자 소버린은 경영 불참을 선언하고 2005년 7월 보유주식 전부를 9326억원에 매각하고 철수했다. 주식매매 차익만 원금의 4.3배인 7558억원에 달했다. 여기에 배당금 458억원과 환차익 1316억원 등을 합해 소버린은 총 9459억원의 차익을 얻었다.
◇외국 투기자본의 집요한 공격 계속=소버린 사태 이후에도 투기자본의 공격은 지속됐다. 헤르메스펀드는 2003년 11월부터 2004년 3월에 걸쳐 삼성물산 주식을 5% 매집하고 경영진에 삼성전자 주식 매각, 우선주 소각 등을 요구하며 경영에 간섭했다. 또 수차례 언론 접촉을 통해 삼성물산 주식이 인수·합병(M&A) 테마주로 인식되도록 한 뒤 삼성물산 보유 주식 전량 매도로 72억원의 차익을 실현했다. 언론 플레이로 삼성물산의 주가를 상승시키고 거래량을 증가시킨 후 주식을 매도해 차익을 챙긴 것이다.
2006년 2월에는 미국계 펀드 칼 아이칸이 다른 헤지펀드와 연대해 기습적으로 KT&G 주식 5.69%를 매집하고, 경영참여 의사를 밝혔다. 칼 아이칸은 KT&G 경영진에 한국인삼공사의 상장과 보유 부동산의 매각을 통해 배당을 확대하라고 요구하며 KT&G와 분쟁을 이어나갔다. 칼 아이칸이 KT&G와 경영권 분쟁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KT&G는 칼 아이칸의 요구사항을 사실상 대부분 수용했다. 그러나 칼 아이칸은 2006년 12월 약 1500억원의 주식매도 차익을 실현하고 KT&G에서 철수했다.
◇외환위기 이후 M&A 공수 불균형 발생=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기업 구조조정과 M&A 활성화를 위해 경영권 보호 장치를 없앴다. ‘대량주식 소유제한’이나 ‘외국인의 국내기업 주식 10% 이상 취득 시 당해 기업 이사회 동의 요건’ 등이 폐지되면서 외부 자본의 공격에 대한 규제가 완화됐다. 반면 차등의결권, 거부권주식 등 다양한 유형의 주식발행불허 및 대주주 의결권 제한 등 경영권 방어에 대한 규제는 유지됐다. M&A 공격·방어 수단 간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외국 투기자본에 의한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 분쟁이 늘어났고, 정부는 2009년 12월 ‘효율적 경영권 방어제도 개선을 위해 포이즌 필 도입안 입법예고’에 나섰다.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은 적대적 M&A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매수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해 적대적 M&A 시도자의 지분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제도를 뜻한다. 이 제도는 실효성과 경제성이 해외에서도 입증된 효과적 방어수단이었지만 당시 시민단체, 국회 반대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도입이 거론되는 경영권 방어 수단들=최근 삼성물산과 엘리엇이 분쟁을 겪으면서 관련 포이즌 필의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미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선진국이 이를 도입하고 있다. 1주 1의결권이 아닌, 1주 다수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제도’와 지분비율과 무관하게 주요 경영사항에 거부권 행사가 가능한 ‘황금주 제도’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위 경영권 방어 수단들은 모두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일각에서는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할 경우 외국자본 차별로 비춰져 외국인 투자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13일 “포이즌 필 등의 방어수단은 이미 외국인 차별 제도가 아닌 투기자본과 투기펀드를 차별하는 제도”라며 “외국 주요 기관투자가들은 포이즌 필 도입에 반대하지 않고 남용방지 장치를 권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도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으로 경영환경이 안정되면, 기업은 장기적 시각에서 투자가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기업 가치 증대로 이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노용택 기자 nyt@kmib.co.kr
[경제 히스토리] 기업 경영권 방어, 투자냐 먹튀냐 걸러내는 ‘독약 처방’을 허하라
입력 2015-08-14 0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