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딜쿠샤

입력 2015-08-13 00:10

독립문에서 사직터널 위로 나 있는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주변과 색다른 서양식 2층 건물을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이 건물을 ‘은행나무 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집 바로 옆에 동네이름 행촌동(杏村洞)과 어울리는 수령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 머릿돌에‘DILKUSHA(딜쿠샤) 1923’과 작은 글씨로 ‘PSALM CXXVII-I(시편 127편 1절)’이라는 명문이 음각돼 있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등을 뜻한다. 집 주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식민지 시절 영국인이 인도 북부 러크나우에 세운 바로크식 여름사냥 별장, ‘딜쿠샤 궁전’에서 이름을 따왔다.

앨버트는 조선에서 금광사업으로 부를 일군 아버지로 인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UPI통신의 전신 UPA통신 서울특파원이었던 그는 1919년 일제가 저지른 화성 제암리 사건과 3·1운동을 세계에 처음 알린 외국인이다. 이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계속된 반일활동으로 1942년 미국으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10여개의 방이 딸려 있는 딜쿠샤는 건축 당시 조선에서 제일 큰 개인저택이었으나 지금은 금방이라도 지붕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초라하기 그지없다. 앨버트가 쫓겨난 뒤 방치돼 온 탓이다. 현재 국가 소유로 돼있으나 15가구 20여명이 무단 점유해 살고 있다.

서울시는 건물의 역사성과 건축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딜쿠샤를 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 한국을 너무나 사랑해 양화진에 뼈를 묻은 앨버트의 업적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도 당연한 조치다. 그러나 정부와 서울시가 딜쿠샤 거주민 이주비용 책임을 서로 미루고 있어 언제 문제가 매듭지어질지는 미지수다. 앨버트가 이런 꼴을 보자고 한국 땅에 묻힌 건 아닐 텐데.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