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중앙정보부 취조실. 전기고문을 당하던 신영복은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거는 소리를 듣고 ‘의료 처치를 요청하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아침에 우리 집 애 감기약 부탁했는데 퇴근하기 전에 내 책상에 갖다 놓으라”는 말이 나왔다. ‘남의 아들에 대한 전기고문과 자기 딸의 감기약….’ 하지만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은 나중에 ‘감기약’이 연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번 놀란다. 스스로를 냉혹한 인간으로 만들어 피의자를 몸서리치게 하는 수사기법은 한 인간에 대한 절망을 넘어 정치권력 자체에 대한 소름끼치는 공포였다고 그는 저서 ‘담론’에서 토로했다.
이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현재의 국가정보원이 됐다. 그러나 정보기관은 형태만 달리했을 뿐 국민들 삶에 부정적 영향을 꾸준히 미쳐 왔다. 61년 창설 이후 80년대까지 신체적 가혹행위와 납치, 사건 조작이 다수 있었다면 90년대에는 도청과 미행 사건들이 불거졌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세상이 되자 댓글을 달고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해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군사정권이 끝난 뒤 정보기관의 역기능을 고치기 위한 논의가 여러 차례 이뤄졌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라는 것도 만들어 과거를 반성하고 새 출발하자는 다짐까지 내놨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도루묵이 됐다. 여기에는 정보기관에 대한 통수권자, 즉 대통령의 태도가 결정적 영향을 줬다. 후보 시절 정보기관의 힘을 빼겠다고 공언했던 한 대통령은 집권 초 청와대에서 ‘독대 정보보고’를 받고는 태도를 180도 바꿨다. 그가 “거기서 이리 중요한 일도 하느냐”고 반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집권기간 조직은 더욱 비대해졌고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해킹 사건 이후에도 ‘국정원 문제’는 산으로 가고 있다. 여당과 국정원은 조직보호 논리에 빠져 있다. 국가안보를 위해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란다. 조직보호 논리의 맹점은 조직이 끝장나는 순간까지 그 구성원들이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사실 모른다기보다 일부러 외면하는 측면이 강하다. 야당의 모습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단 목소리를 높이고 보자는 태도는 국민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금처럼 양측이 논쟁만 벌인다면 국정원은 다시 한번 갱생(更生)의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다. 정보기관과 집권층 수뇌부가 이걸 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미국 CIA도 되고, 이스라엘 모사드도 되는데 어째서 우리는 안 되느냐’는 항변이 왜 대한민국에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지 곰곰이 되새겨봐야 한다. 수십 년의 ‘음습한’ 적폐를 씻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를 믿어 달라’고만 되풀이하는 꼴이다. 신뢰를 잃은 조직은 오래 지탱하기 어렵다.
그래서 발전적 조직 분리를 제안한다. 거대하게 하나로 뭉쳐 있어야 힘이 생기는 시절은 끝났다. 정보 선진국의 조직을 본뜨든,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든 지금 모습으로는 더 이상 제 역할을 하기 힘들다. 해외와 북한, 국내로 쪼개거나 기능별로 기관을 나눌 수 있다. 정부와 정치권과 각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최적의 조합을 찾아보자. 우리에게는 작아도 투명한 정보기관이 절실하다.
아울러 정보기관 얘기만 나오면 이른바 ‘국가안보론’으로 맞대응하는 수준 떨어지는 태도도 버릴 때가 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국정원 직원들은 동료의 자살 직후 ‘조직을 흔들지 말라’는 울분에 찬 집단 성명을 낼 게 아니라 조직의 발전적 미래를 차분하게 준비하는 게 맞았다.
mshan@kmib.co.kr
[데스크시각-한민수] 작아도 투명한 정보기관이라야
입력 2015-08-13 00:47 수정 2015-08-13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