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기업 특집-한진그룹] 트럭 한 대로 시작, 수송 글로벌 기업 ‘우뚝’

입력 2015-08-13 02:42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오른쪽)가 1970년 외화획득에 이바지한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뒤 악수를 하고 있다.한진그룹 제공

광복 이후 한진그룹의 발자취는 대한민국 수송산업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1945년 8월 15일 인천항에는 중국 상하이로부터 운동화, 옷, 밀가루 등 생필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물건들이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면서 우리나라 경제는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1945년 11월 1일 인천 중구 해안동에 한진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운송업에 발을 디뎠다. 밑천은 트럭 한 대뿐이었지만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트럭은 2년 만에 10대로 늘었고, 1947년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대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아 수송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성공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창업 5년 만인 1950년, 6·25전쟁의 포화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한진상사는 전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차량과 장비들은 모두 군수물자로 동원돼 뿔뿔이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빚뿐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난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다시 밤낮없이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그 결과 휴전 2년 뒤인 1955년에는 한국전쟁 이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

한진이 성장한 결정적 계기는 베트남 특수였다. 베트남전 당시 경제사찰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들렀던 조 회장은 그 곳에 큰 기회가 있다는 걸 직감했다고 한다. 미국 펜타곤을 직접 방문하고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1950년대부터 국내 주둔 미군 기지에서 물자 수송을 담당하며 다져온 신뢰와 끈끈한 유대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진이 1966년부터 5년간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은 1억5000만 달러로 집계된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화가 5000만 달러인 시절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한진은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축적한 경험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잇달아 사업 확대에 나섰다.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세우고, 막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현 메리츠화재)를 인수했다.

지금은 한진그룹의 상징이 된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것도 이 무렵이다. 대한항공공사 인수 과정에서는 내부 반발도 있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부실 항공사였고, 항공운송사업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베트남에서 고생해 번 돈을 밑 빠진 독에 붓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수송보국(輸送報國)’을 경영철학으로 삼았던 조 회장은 “돈을 벌자고 시작했지만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다”며 인수를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대한항공은 현재 보유 항공기 153대, 45개국 128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는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해 한진그룹의 중추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