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고, 근로자는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고 있다. 비정규직은 차별에 울고, 여성은 일과 가정 어느 것도 제대로 돌보기 어려운 현실에 시름한다. 정부는 노동시장 개혁에 사활을 걸겠다며 ‘양보와 타협’을 주문하고 나섰다. 하지만 불황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근로자들에겐 아직 남의 얘기일 뿐이다. 노·사, 노·노, 노·정 간 첨예한 입장 차이로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는 동안 현장의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간다. 국민일보는 노동개혁의 주요 이슈를 현장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기획 시리즈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달 지방의 한 교통공사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5월부터 두 달 넘게 노사가 교섭을 벌였지만 결렬됐다. 사측은 협상에서 근로자들을 설득할 방안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임금 총액 동결? 설득할 카드가 없다=이 회사는 이미 ‘60세 정년’을 보장하고 있다. 임금피크제의 핵심은 고령자의 임금을 깎아 근로자가 더 오래 고용을 보장받게 하면서 사측은 인건비 부담을 크게 늘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2013년 정년 60세 의무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내년부터 정년 60세 시대가 열린다. 근로자 입장에선 이미 정년 연장을 보장받은 마당에 임금을 줄이는 방안에 사인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됐다. 반대로 사측은 근로자에게 총액 임금 동결을 제안하며 반대급부로 내밀 카드가 사라진 셈이다.
이 회사에서 전동차 검수를 담당하는 최모(56)씨는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했다. 최씨는 “정년이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임금만 양보할 순 없었다”며 “내 또래는 한창 돈이 많이 들 나이다. 대학에 다니는 자식들 등록금 대려면 힘이 부친다”고 했다. 그는 “회사에선 임금피크제로 돈을 아껴 신규 채용에 쓴다는데 이해할 수 없다. 취직을 앞둔 아들이 있는 입장에서 신규 채용 늘린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사측에서 요구한 임금피크제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사측도 정년연장 카드 없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게 무리임을 인정했다. 이 회사 노사협력팀 관계자는 “행정자치부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을 요구해 노조와 협상은 했지만 신규 채용을 늘린다는 조건밖에 제시할 게 없어 답답했다”며 “이달 중 구체적 조건을 갖고 다시 노조와 협상에 나서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고용노동부가 조사한 9034개 기업 중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은 9.4%에 불과하다. 10곳 중 7곳은 향후 도입 계획도 없었다. 근로자 입장에선 달가울 리 없고 기업들은 근로자를 설득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년 늘었지만 유쾌하지는 않다=차모(57)씨는 건설기계 생산 업체 공장에서 굴착기 조립 일을 한다. 30년간 해온 일이지만 요즘 들어 마음고생이 심했다. 업무 특성상 무거운 부품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이가 들면서 부쩍 힘이 부쳐서다.
올해 57세인 차씨는 임금피크제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곧 정년퇴직해야 했다. 2012년 이 회사는 정년을 59세로 늘리는 대신 58세에 기존 임금의 80%, 59세에 70%만 받는 임금피크제에 노조와 합의했다. 덕분에 차씨는 2년 더 다닐 수 있게 됐다.
차씨는 “처음엔 정년이 늘어난대서 기뻤지만 지금은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줄어든 임금은 큰 문제가 아니다. 나이를 먹었는데 노동 강도는 줄지 않아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고 굴착기 운전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임금피크제 도입이 능사는 아니다. 차씨처럼 정년이 늘어나도 업무에 흥미를 잃거나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직책과 관련된 딜레마도 존재한다. 인사 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정년연장 대상자의 기존 직책을 거둬들이면 숙련된 근로자들이 단순 업무에 종사하게 될 수도 있다. 정년연장 대상자가 기존 직책을 유지하면 인사 적체 심화로 젊은 근로자의 근로 의욕이 저하될 수도 있다.
◇양보로 상생을 모색하다=경북의 한 자동차 부품 회사는 2005년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노조가 기존 정년인 58세1개월을 58세12개월로 늘려 달라고 요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사측은 인건비 부담에 고심하다 노조에 임금피크제를 제시했다. 처음부터 임금피크제 도입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임금 감액률을 두고 노사가 맞섰다. 사측은 30%, 노조는 10%를 주장했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결국 중간 수준인 20%에 합의했다.
임금피크제를 통해 회사는 숙련된 기술을 가진 근로자를 11개월 더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근로자도 정년이 연장돼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모두가 임금피크제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58세로 정년을 코앞에 뒀던 김모씨는 20%나 적은 임금을 받느니 퇴직 후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곧 다시 회사에 찾아와 정년까지 근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재취업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 노사상생팀장은 “임금피크제 도입 효과를 비용 절감이나 고용 증가 같은 계량화된 수치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금피크제 도입 후 노사 간 정서적 유대가 강해졌고 직원들의 몰입도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한 편의점 프랜차이즈 업체는 지난해 업계 최초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기존 55세 정년을 60세로 5년 늘리는 대신 55세에 기존 임금의 65%만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5%씩 임금을 줄여 59세에는 45%를 받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이 회사 경영기획팀 곽모(39)씨는 당시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으로 사측과 임금피크제 도입을 협의했다. 곽씨는 “처음엔 정년연장을 남의 일로만 느끼던 젊은 직원들이 이제는 취지를 이해한다”며 “나도 아직 정년이 20년 남았지만 안정적 근무 여건이 마련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영관리본부 관계자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절감된 인건비를 향후 신규 인력 채용에 쓸 방침”이라며 “정년연장 대상자들은 경험과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업무에 배치했다”고 전했다. 현재 이 회사에는 임금피크제로 정년이 연장된 사원 3명이 감사실과 물류센터 등에서 일하고 있다.
◇성급한 정년연장이 문제?=‘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 법률’에 따라 내년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60세 정년이 의무화된다. 2017년부터는 300인 미만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된다. 당시 재계는 인건비 부담이 급증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여야 합의로 법안이 통과됐다. 정치권은 법률에 ‘사업 또는 사업장 여건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조항만 달아놨을 뿐 임금체계와 관련해선 아무런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갈등이 촉발됐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연공서열형 임금제에선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 부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임금체계 개편이나 임금 부담 조정 등에 대한 사전 조율과 충분한 논의 없이 정년만 연장된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혼란의 책임을 정치권에만 돌리지 않았다. 권 교수는 “정년연장법이 통과된 뒤 임금체계 개편을 논의할 2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노·사·정 모두 손을 놓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현장에서 본 노동개혁] 고용안정·청년고용 ‘두 토끼 잡기’ 딜레마
입력 2015-08-11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