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연행된 뒤 여권도 없이 말레이시아로 추방된 나는 말레이시아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임시 여권을 받아 한국으로 들어왔다. 맥이 빠진 나는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가 방글라데시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선교를 했는데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나요. 다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세요.”
한국서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추방당한 나를 반겨줄 안식처가 한 곳도 없는 것이 서글펐다. 아는 교회 선교관에 며칠 머물다 양평의 한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금식하며 깊이 기도하는데 그동안 선교를 한답시고 현지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보인 나의 여러 부분들이 기억나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현지인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기도 했고 혈기를 참지 못한 적도 많았다.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이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를 지킨다”는 응답을 주셔서 일주일 만에 기도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이후 은혜의 섭리로 희망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교회 스태프 14명이 법정에 서서 “브러더가 자신들을 강제로 개종시켰다”고 말만 하면 자신들은 풀려나고 내 죄가 인정돼 추방을 합법화되는 것이 일의 순서였다. 그런데 우리 스태프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는 자발적으로 개종했지 브러더가 강제로 개종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주었다.
이 때문에 재판이 2년여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지만 결국 우리가 이기고 나도 무죄가 되어 재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할렐루야!
다행히 아내는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학교와 교회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아내는 운영비 마련과 함께 모든 결정을 혼자 내려야 해 무척 힘들어했다.
사역자들과 성도들, 주민들과 나는 2년 만에 재회를 한 뒤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2년여 한국에서 안식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나는 이제 새로운 마음의 자세로 방글라데시 선교에 임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너무 적극적인 선교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기에 신중하게 하기로 했다. 대신 몰라떽이 아닌 다른 곳으로도 전도의 범위를 넓혔다.
교회와 떨어진 ‘통기’란 지역에서 오는 성도들이 너무 멀어 교회 건립을 계속 요청했었다. 나는 중심부 한 허름한 건물을 임차해 수리를 끝내고 초등학교부터 개교했다. 어린이들이 몰려왔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문도 열었다. 이곳 아이들에게도 책과 공책, 교복을 제공하고 점심급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또 한바탕 영적 전쟁이 시작될 것을 예상하고 성도들과 기도에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슬림들의 항의와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이미 몰라떽에서 전투(?)경험이 많은 사역자들을 통기로 발령을 냈기에 웬만한 공격은 쉽게 이겨낼 수 있었다.
통기교회가 개척되고 나니 이번엔 도킨칸 지역도 교회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다. 이곳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한 결과 도킨칸에도 십자가를 단 교회가 시작됐고 이 여세를 몰아 나의 오랜 기도제목이었던 평강양로원이 문을 열었다.
갈 곳 없는 병든 무의탁 노인들은 거리에서 구걸하다 굶어 죽는 분들이 많아 이분들을 모아 양로원을 열었으면 했는데 독지가가 나타난 것이다. 양로원에 온 노인들은 세 끼 걱정 안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제공되니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며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천국에 가셨다.
복음은 사랑이다. 왜 저 사람들이 못사는 나라, 그중에서도 이런 촌동네에 와서 학교를 세우고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가? 그 이유를 따져들게 만들다 보면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몸으로 전하는 복음이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천록 (16) 사역자들 “자발적 개종” 증언으로 재판서 ‘무죄’
입력 2015-08-12 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