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다. 무협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박흥식 감독은 ‘인어공주’(2004)를 찍을 때부터 ‘협녀, 칼의 기억’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오던 얘기를 2012년 전도연에게 들려주고 이병헌마저 캐스팅해 2년 전 촬영을 끝냈다. 그러나 ‘이병헌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계속 개봉을 미뤄야 했다.
13일 개봉되는 ‘협녀, 칼의 기억’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만큼이나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관심을 모았다. 전도연과 이병헌이 ‘내 마음의 풍금’(1999) 이후 16년 만에 호흡을 맞췄다는 점에서도 화제였다. “영화감독으로 좀더 성장하고 싶었다”는 박 감독은 한국식 무협영화를 자신만의 연출력으로 내놓았고, 두 주연 배우는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환상의 커플 연기를 뽐냈다.
‘칸의 여왕’ 전도연은 대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유백을 향한 증오로 평생 고뇌 속에 살고 있는 월소를 만나 변신을 꾀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검객으로 거듭나고, 눈동자의 움직임 없이도 감정을 표현하는 맹인연기도 소화해냈다. 이병헌은 선 굵은 캐릭터로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넘어서는 카리스마를 선보여 “역시 이병헌”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무신이 지배하던 혼돈의 시대 고려 말. 풍천(배수빈) 월소(전도연) 유백(이병헌) 등 풍진삼협은 세상을 바꾸고자 뜻을 모아 민란의 선봉장이 된다. 하지만 유백의 배신으로 풍천은 죽고 월소는 풍천의 아이 홍이를 데리고 사라진다. 18년 후 유백은 최고의 권력자가 되지만 두 눈을 잃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던 월소가 홍이(김고은)를 통해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권력을 탐하는 이병헌의 검, 대의를 지키는 전도연의 검, 복수를 꿈꾸는 김고은의 검. 각기 목적이 다른 세 가지 검이 현란하게 춤을 춘다. 노랗게 물든 해바라기 밭에서,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솟은 대나무 숲에서. 검객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칼싸움을 펼치는 장면에서는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눈 내리는 밤중 어두컴컴한 궁궐의 담장 옆에서 칼끼리의 부딪힘을 빛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장면은 이채롭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한 고려시대 풍경과 의상도 볼거리다. 풍진삼협의 스승 역 이경영, 고려를 손에 쥔 권력가 존복 역 김태우, 유백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무사 율 역 이준호,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이의명 장군 역 문성근 등 조연들의 연기도 빛난다.
문제는 스토리의 개연성이다.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가 권력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배신을 했다. 여자도 어쩔 수 없이 배신에 동조했다. 여자는 남자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눈을 스스로 멀게 하고 아이까지 동원해 복수의 칼을 간다. 원한이 그렇게도 사무쳤다는 말인가. 무협의 세계가 너무나 비장하다. 무협소설을 접하지 않은 관객들이 어떤 재미를 느낄까. 15세 관람가. 121분.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현란하게 춤추는 세 개의 劍… 한국형 무협영화 ‘협녀, 칼의 기억’
입력 2015-08-12 0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