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랜턴 대부인은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달리 건강 문제를 제외하고는 선교 사역과 주변 상황은 무난했다. 이화학당에 나가 종종 영어를 가르쳤고 상동교회와 부인성경학원을 통해 양육한 전도부인 을 경기도 일대에 파송해 교인을 지도했다. 대부인은 서울 달성궁 자택에 주로 머물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에 힘을 싣는 것으로 마지막 힘을 다했다.
여성 깨우는 교육에 마지막 힘 쏟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생의 마지막에 봉사한 영역은 교육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진명여학교 설립이었다. 진명여학교는 고종황제의 계비인 엄황귀비와 그의 동생 엄준원이 세운 ‘준황실’ 학교였다. 엄준원의 딸이 상동교회 부속 공옥여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근대 여성교육기관 설립 뜻을 전했던 것이다. 이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 출신 여메레를 소개하고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여메레는 일본 도쿄의 ‘황실여학교’를 시찰했고 1905년 엄준원의 달성궁 사택에서 사숙 형태로 학교를 시작했다. 곧바로 고종황제는 ‘진명(進明)’이란 이름을 지어내려 보내고 경복궁 옆 창성위궁(현 창성동) 부지와 건물을 하사함으로 1906년 4월 정식 개교했다. 초대 교장은 엄준원이었지만 학교 운영의 실질적 책임은 학감 여메레가 맡았다.
여메레는 이화학당의 초창기 학생이었다. 이제 어엿한 한국교회 여성 지도자가 되어 ‘귀족원’ 학교를 맡아 운영하게 됐으니 이는 기독교 선교 20년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병약한 중에도 진명여학교에 나가 영어를 가르쳤다. 1907년에는 평양에도 진명여학교 분교가 설립됐고 여메레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진명여학교와 함께 스크랜턴 대부인이 새로 시작한 교육사역은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한 단기 교육과정을 개설한 것이다. 당시 교회와 가정, 지역사회에는 여성 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문제는 여성 문맹률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지방교회의 여신도 중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성을 가르칠 여성교사가 태부족이었다.
전도부인 양성기관인 감리교 부인성경학원이 있긴 했지만 현장에서 필요한 여성 지도자들을 제때 공급하기는 어려웠다. 이화학당과 공옥여학교 등이 있었지만 기혼 여성들은 배울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스크랜턴 대부인은 교회의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글을 비롯해 기초과목, 성경을 가르치는 여학교를 시작했다.
학교 설립엔 이화학당 초기 졸업생으로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 190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BA) 학위를 받고 돌아온 하란사가 힘이 됐다.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조선 여성이 가르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지원했다. 1907년 시작했다. ‘상동여자중학교’의 탄생이었다.
한편 스크랜턴 대부인의 지휘를 받는 전도부인들은 모두 9명이었는데 이들은 외진 산골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9명의 전도부인들은 1년간 4000 가정을 방문했고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여성만 2만 명이 넘었다. 전도부인들은 남성 사역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안방 깊숙한 곳과 산골까지 파고들며 복음을 전했고, 우상 숭배와 봉건적 관습의 노예로 살던 여성들을 해방시켰다.
한국인들의 참 어머니, 별세하다
스크랜턴 대부인의 건강은 1908년 눈에 띄게 나빠졌다. 지방 순회는 엄두고 내지 못했고 진명여학교 사역에서도 손을 뗐다. 이듬해에 접어들자 더 악화됐다. 이전 같으면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을 만했는데 이번에는 포기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4년 한국으로 귀환하면서 이미 한국에서 뼈를 묻을 것을 결심했다. 친정 부모와 남편이 묻혀 있는 미국 하트포드나 뉴헤이븐보다 동료 선교사 존 헤론과 윌리엄 홀이 묻혀 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던 것이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문병하러 온 후배 선교사와 전도부인들에게 조언을 하며 ‘병상 목회와 선교’를 감당했다. 1909년 6월 미국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연례회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됐다. “한국인들은 그를 사랑하는 친구로 여기는데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그를 ‘노부인(The No Puin)’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칭호입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하여 여성을, 그리고 한국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마침내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9년 10월 8일 금요일 아침,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77세였다. 그는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을 기도와 찬송, 성경읽기로 극복했고 병상에서 간호하는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랑의 본을 보였다. 혼수상태에 들어가기 사흘 전에는 집안 하인들과 가까이서 사역했던 토착교인 몇 명을 초청해 마지막 성찬을 거행하기도 했다.
장례식은 10월 10일 주일 오후에 상동교회에서 거행됐다. 유가족들은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익숙한 3일장 관습을 따랐다. 장례식 날 운구 직전에는 궁궐에서 관리가 나와 시신이 담긴 관 앞에서 세 번의 절을 하며 예를 표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왕비’ 같은 존재로 남았다.
그의 상여가 남대문을 떠나 양화진에 이르기까지 8㎞의 운구행렬에는 연령과 성별, 신분을 초월해 수천 명의 시민들이 동행했다. 그의 별세 소식은 한말 대표적 민족 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에 실렸고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기록됐다. 추모 분위기는 해를 넘겨 이어졌고 1911년 선교사 잡지였던 ‘The Korea Mission Field’ 6월호 표지에 ‘교회의 승리자’란 제목으로 메리 플레처 스크랜턴의 삶이 다뤄졌다.
그의 양화진 묘지는 헤론과 홀의 무덤 바로 건너편에 조성됐다. 아들 스크랜턴 박사의 손으로 마련된 소박한 화강암 묘비가 세워졌다. 3층 기단 위에 세워진 라틴십자 모양 묘비에는 헬라어 ‘예수(IHSUS)’의 약자 ‘IHS’가 새겨져 있다. 아들의 눈에 어머니는 오직 예수로 인해, 예수를 위해, 예수처럼 살기를 원했던 ‘예수의 사람’이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9) 어머니의 마지막 사역과 별세
입력 2015-08-11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