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김영석(21)씨는 1주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한다. 평일엔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토요일엔 편의점에서 일한다. 김씨는 편의점 일을 시작하면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몇 차례 해왔지만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그냥 주는 대로 받고, 일하라는 대로 일했다. 애초 약속한 근로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김서영(24·여)씨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방송국에서 자료조사 업무를 했지만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는데 구두계약으로 한 달에 얼마를 받을지만 약속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은 탓에 더 일하거나 주말에 출근을 해도 초과수당을 받지 못했다.
계약서는 노동·서비스·물품 등을 제공키로 약속했음을 증명하는 서류다. 계약의 조건과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 다양한 갈등·분쟁을 조정하고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계약서를 쓰는 데 여전히 인색하다.
근로계약은 물론 납품계약까지 ‘말’로 처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갑’의 우월적 지위에 눌려 ‘을’은 계약서를 쓰자는 말조차 못 꺼내고, 계약서를 안 썼으니 그 횡포에 속수무책 당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계약서 쓰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근로계약서 작성률은 3년째 증가세다. 2012년 53.6%, 2013년 55.4%에 이어 지난해 56.7%에 달했다. 하지만 현실과 거리감 있는 통계라는 지적이 나온다. 알바노조 이혜정 사무국장은 6일 “전수조사를 하지 않은 통계로 실제 근로계약서 작성률은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근로계약서 작성은 법이 정한 의무인데도 정부는 60%를 밑도는 수치를 두고 성과를 냈다고 자랑한다”며 비판했다.
회사 간 거래에서도 계약서 미교부는 비일비재하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 계열 광고대행사 7곳에 과징금 33억원을 부과했다. 이들은 모두 계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하지 않거나 계약 체결일보다 한참 뒤에 계약서를 교부했다.
광고업계에선 용역을 마친 후에 계약서를 쓰는 게 관행이다. 계약서가 없는 탓에 소규모 광고회사는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업계에선 이를 ‘치고 빠지기’라고 한다. 계약서를 작성한다고 해도 가이드라인 수준의 가계약서를 쓰는 일이 잦다. 공정위가 2013년 5월 광고업계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했더니 용역 계약서를 쓴 사례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공정위는 그해 12월 광고업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전면 개정했다. 지난달 1일 ‘광고업종의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추가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진 건 없다.
홈쇼핑업계도 ‘계약서 사각지대’다. 지난 3월 공정위는 계약서면 미교부 및 지연교부, 구두 발주 등 불공정행위를 한 TV홈쇼핑사업자 6곳에 과징금 143억6800만원을 부과했다. 6개 업체 중에는 350개가 넘는 납품업체와 계약서를 쓰지 않은 곳도 있었다. 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상품을 미리 제조·주문할 것을 요구한 업체도 있었다.
공정위는 제재 내용을 미래창조과학부에 통보하면서 TV홈쇼핑사업 재승인 심사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롯데·현대홈쇼핑은 지난 5월, NS홈쇼핑은 지난 6월 재승인 심사를 통과했다. 공정거래조정원 관계자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 관행은 우월한 위치에 있는 갑의 지위를 남용한 것”이라며 “엄격한 법 집행으로 이런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기획] ‘계약서 안 쓰는 사회’… 甲 횡포 악순환 부추긴다
입력 2015-08-07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