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감각이 없어졌다. 목장갑은 헤지다 못해 찢어졌다. 검정 플라스틱 버킷(양동이)을 날랐다. 흙이 가득 담긴 버킷이다. 버킷 한 통 무게는 3∼5㎏. 이 버킷을 양손에 들고 비탈길을 올랐고 흙을 쏟았다. 땀은 비 오듯 했고 숨은 턱턱 막혔다. 버킷에 담긴 흙을 버리고 온 횟수만 100번은 족히 넘었다. 흙은 무려 1000∼3000년 전 것이다. 학자들도 곡괭이와 삽을 잡았다. 몇 번 내리찍다가 바위나 돌, 단단한 지면을 건드리면 즉시 멈췄다. 그리고는 작은 모종삽으로 흙을 긁어냈다. 토기처럼 생긴 모양이 드러나자 솔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이내 학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스라엘 ‘텔 라기스’ 성서고고학 발굴 현장이다.
국민일보는 지난달 22∼27일까지 ‘텔 라기스 한국 발굴단’의 현지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발굴단은 BC 10세기 남유다 왕국 르호보암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 성벽을 처음 발견했다(국민일보 7월 28일자 25면 참조).
최초의 한국 단독 발굴단
영화 ‘인디애나존스’가 보여준 스릴과 모험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의 폭염 속에 곡괭이질과 삽질 소리, 흙먼지만 날렸다. 고고학자들은 마치 막노동자처럼 일했다. 직접 곡괭이질을 하는 것은 예사였고 삽질과 솔질까지 전부 도맡았다. 고고학은 ‘흙을 파는 행위를 추적하는 것’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텔 라기스 한국 발굴단은 2013년 라기스 북쪽 능선에 대한 시험 발굴을 시작해 지난해부터 본격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그동안 느헤미야 시대와 예레미야 시대, 히스기야 시대까지의 성벽을 확인했고 이번에 르호보암 시대의 성벽을 만났다.
발굴단장 홍순화(한국성서지리연구원, 주심교회) 목사는 “현재까지 5개 시대의 지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내년에는 중기 청동기시대(족장시대)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족장시대란 이삭과 야곱이 살던 시대를 말한다.
발굴단은 3년 전 이스라엘 고고학 당국(IAA)의 허락을 받아 히브리대와 공동 발굴을 진행했다. 발굴단장과 발굴실장을 비롯해 스태프와 자원봉사자 모두 한국인으로 구성했고, 발굴 성과물에 대한 연구 권한도 한국팀이 가진다는 점에서 한국 성서고고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2차 발굴은 6월 21일부터 지난달 30일까지 실시됐다.
이스라엘 내 고고학 발굴은 학술 발굴과 구제 발굴로 구분한다. 학술 발굴은 주로 학자들이 주도한다. 매년 여름 한철에 국한한다. 구제 발굴은 각종 도로 건설이나 건축, 산업단지 조성 시 유물이나 터가 발견될 때 실시한다. 공사는 전면 중단되고 이스라엘 문화재청이 직접 나서서 발굴한다. 발굴 유물은 모두 이스라엘 고고학 당국이 관리한다. 이스라엘에 조성돼 있는 국립공원이나 성지순례지(地) 상당수는 이렇게 고고학 발굴의 성과로 이뤄졌다.
성경시대의 삶 드러내
텔 라기스 고고학 발굴 작업은 새벽 5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행됐다. 고고학자들은 흙을 파 들어가면서 지층의 형태를 분석했고, 흙에 섞여 있는 토기 조각이나 동물의 뼈, 곡식, 불에 탄 흔적 등을 유심히 살폈다. 토기 조각 등이 나오면 작은 도구를 사용해 흙을 고르고 털어내면서 시대를 면밀히 검토했다. 발굴된 유물은 지층이나 구역을 구분해 고유 번호를 부여했다. 부서지지 않은 토기나 뼈 등은 종이에 따로 담았다.
토기 중 문양이나 글씨가 발견되면 각별히 신경을 쓴다. 해당 시대를 보여주는 직접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 발굴단 스태프인 장상엽(히브리대 고고학 박사과정)씨는 BC 10세기를 증명하는 ‘왕’ ‘노예’ 등의 글씨가 있는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 이 조각은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발굴 작업은 무조건 땅만 파는 것은 아니다. 유물 위치를 중심으로 격자(사각형) 형태로 주변을 조성하고 기준점을 정한다. 일반적으로 7.6∼15㎝ 두께로 높이를 정해놓고 발굴 작업을 하면서 자료를 분류한다. 수거된 토기조각 등 유물은 발굴팀 숙소로 가져와 세척 작업을 한다. 세척이 끝나면 토기에 대한 품평과 시대 추정 작업을 실시한다. 이렇게 구분한 토기는 이스라엘 문화재청으로 보내진다.
발굴실장 강후구(45·서울장신대) 교수는 “고고학은 땀을 흘려서 과거의 삶을 드러내는 학문”이라며 “공동의 땀을 통해 희열을 맛본다”고 말했다. 발굴단 스태프 최광현(49) 박사도 “성서고고학은 성경 시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며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도 제시한다”고 말했다.
라기스 발굴 현장에는 고고학자를 제외한 자원봉사들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미국팀의 경우 한 달 휴가를 내고 봉사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발굴단 기획실장 이태종(수지교회) 목사는 “미국이나 유럽 기독교인들은 성서고고학 발굴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품격 있는 자원봉사로 생각한다”며 “한국교회도 이제 성서고고학 발굴 봉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성서고고학 분야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고세진 전 아세아연합신학대 총장 이후 김성(협성대) 원용국(안양대) 한상인(한세대) 강후구(서울장신대) 교수 등이 학교를 중심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교단 신학교 중엔 고고학자가 없는 곳도 많다.
라기스(이스라엘)=글·사진 신상목 기자
[이스라엘 ‘텔 라기스’ 한국 발굴단] 사막 폭염·흙먼지 뚫고 비지땀… 3000년 전 르호보암 흔적 만나다
입력 2015-08-08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