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돈

입력 2015-08-08 00:16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지.” 흔히 듣는 농담이다. 휴가철에 맞춰 신체 콤플렉스에 관한 좀 가벼운 얘기를 쓸까 하다가 최근 TV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한 세모자 사건을 본 후 느낀 마음을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 식상한 얘기가 될 것 같아 걱정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사람이 돈으로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의 가치 평가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돈을 획득하기 위한 전적인 수단과 교환물로 취급하는 것을 말한다. 보험보상금을 타내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기까지 하며 심지어 가족을 그렇게 하는 어이없는 사건들을 접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돈을 위해 사람들을 홀리고 그들의 정신을 팔아먹는 달인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판을 치게 희생되는 사람도 가끔은 참 답답하다. 뭐 저런 것에 속아 넘어가는가 싶다. 많은 피해자가 사실 돈에 욕심을 부리다가 그렇게 된다. 그 욕심이 더 큰 손해를 낳고 심지어 자기 영혼과 목숨도 내주게 된다.

기독교윤리학자 김중기 교수는 윤리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 중 하나로 ‘돈’을 들었다. 그 주장은 신학생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성경에서처럼 ‘재물’ 혹은 ‘물질’이라고 표현하면 되지 않나 싶은 게 처음 나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곱씹어볼수록 이름을 잘 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극적인 명칭을 붙인 대표적인 인물은 프로이트이다.

그는 인간 본능의 가장 기본 단위를 성욕이라고 불렀다. 원래 용어는 리비도(libido)인데 이는 ‘삶의 욕구’라는 뜻이다. 삶이라는 고상한 용어가 성이라는 자극적인 용어로 옮겨감으로 많은 이들이 프로이트의 주장에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원초적인 것은 확실히 자극적이다. 그 거부와 부담이 오히려 그 용어의 타당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독교가 대놓고 하나님보다 돈을 섬기려고 한다. “예수 믿으면 돈 많이 번다”는 주장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차마 우리나라 예는 내 스스로 못 들겠고 TV에도 나왔던 아프리카의 일부 목사들을 예로 들겠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루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목사들이 비싼 시계와 옷과 자동차로 치장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교인들은 오히려 반기고 환호한다. 목사들은 교인에게 예수 믿으면 자기처럼 된다고 큰소리친다. 교인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열심히 헌금하고 그 돈으로 목사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 앞서 말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래도 차라리 이런 모습이 솔직해 보인다. 우리는 유치하게 ‘돈’이나 ‘성욕’이라고 말하는 대신 고상하게 ‘물질’이나 ‘삶’이라고 말하면서 결국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과 하나 다르지 않는 교회 문화에 젖어들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겠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비판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엄격히 율법을 지키려고 한 만큼이나 이해타산에 계산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눅 16:14)

아, 교회는 둘째 치고 늘 돈 돈 하는 내 일반적인 사고방식부터 냉정히 좀 생각해보아야겠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