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간성교회] 115년 지켜온 신앙 “원산에 심령의 처소 마련” 비전

입력 2015-08-08 00:11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6·25 전쟁 직후 국군에 의해 복구된 간성교회(위 사진). 1960년대 이전으로 추정되는 성탄절 무렵 사진.
왼쪽부터 사모 이미애, 김정삼 류명화 유하열 윤경숙 최금자 한소희 김연화 이신자 권사, 차준만 목사, 하광자 권사(위 사진). 차준만 목사가 인민군 치하에 있던 예배터를 설명하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간성초등학교 자리는 1900년 무렵 좌수 벼슬을 하던 함씨 양반의 와가(瓦家) 16채가 모여 있는 대저택이었다. 어느 날 그 좌수집 여종이 집 뒷동산에 있는 간장독에 간장을 뜨러 갔다가 고목에 숨어 있는 범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간장 종지를 버리고 뛰어 내려왔다. 이 소리에 호랑이도 놀라 좌수집 마구간으로 숨었는데 이 호랑이를 머슴들이 합세해 때려잡았다. 한데 이후 좌수집은 인명 사고가 나고 재산이 줄어들어 결국 망했다. 이후 사람들이 흉가라고 살려 하지 않았다.

1901년 7월 17일 함경도 원산에 본부를 둔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흉가의 일부를 사들여 예배 처소로 삼았다. 이 일행은 로버트 하디(한국명 하리영·1865∼1949) 선교사 팀으로 추정된다. 이 일화는 훗날 간도 용정에 선교사로 파송된 이 교회 출신 남경순의 기억이다. 남경순은 간성과 가까운 원산 루씨학교(감리교 설립 여성 근대교육기관)를 18세에 졸업하고 1904년 간성교회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함씨 집안 큰아들 함인찬이 예수를 믿었다. 그의 부인과 고모는 원산 유학을 통해 전도부인이 됐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본은 1941년 미국을 공격, 이른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 여파는 간성에도 미쳤다. 1941년 그 첫 간성교회를 보통학교(현 간성초교) 부지로 빼앗은 일본은 이전한 초가 ㄱ자 예배당도 보통학교 교실 부족을 이유로 빼앗고 폐쇄시켰다. 간성교회 성도들은 숨어 다니며 예배를 보았다. 예배당이 없어도 예배는 계속됐다. 이것이 ‘간성교회 신앙의 역사’ 이야기이다.



호환(虎患) 속에 설립된 민족 교회

지난 4일 70∼80대 권사 10여명이 그 호랑이가 나오던 동산 위에 우뚝한 간성교회에 모여 ‘눈물 나는’ 믿음생활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살아온 것은 주님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 가운데 최금자(76) 권사의 기억은 우리 민족의 한만큼이나 애달프다. 남북분단이라는 흉가를 만드는 하나님 속내를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열두 살 무렵이었을 거예요. 6·25전쟁으로 피란을 갔다 오니 간성읍내가 쑥대밭이었어요. B-29 등의 폭격으로 커다란 웅덩이가 곳곳에 생겼더라고요. 옛 교회당도 있을 리 없죠. 그런데 동산에 오르니 국군 공병대가 교회를 짓고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을 보니 왜 그리 눈물이 났나 몰라요.”

최 권사가 목격한 공병대에 의한 교회 건축은 1953년 10월 수복 이후로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육군 제15사단 사단장이 크리스천이었고 그때 그 사단장이 군목 최종철 목사에게 돌집 교회 건축을 요청했다. 돌 벽에 함석지붕을 올리려 하자 “함석이 오래 못가니 기와로 바꾸라”는 지시까지 했다고 한다. 사단장은 교회 헌당 후 이를 간성교회 성도들에게 넘겨줬다.

1941∼1953년은 최 권사를 비롯한 노(老) 권사들에게 광기의 시대였다.

1901년 설립된 간성교회는 광복이 되고 다시 예배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위 38선 이북이었던 간성은 북한 땅이 됐고 예배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또다시 해방 전처럼 카타콤 성도가 되어야 했다.

“전쟁이 나고 아버지(최병영)는 일가친척을 먼저 남쪽으로 보내고 북한 탈출을 결심했어요. 한데 몇 번 가족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 살이 도져(초상집에 다녀오면 피를 토하고 몸져눕는 아버지 상태를 표현)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로 인해 백패(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로 찍혀 고초를 당했어요. 아버지는 우차를 이용해 탈출하려다 붙잡혀 공산군에 총살 당하셨어요.”

아버지가 끌려간 사이 최 권사 가족은 지금의 고성군보건소 자리 감자구덩이에 숨어 일주일을 버텼다. 잡히면 몰살이었다. 최 권사의 어머니, 두 형제, 할머니와 고모 등이 그 좁은 구덩이에서 먹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국군이 밀고 올라가면서 기사회생했다. 하얗게 뜬 소녀는 기적처럼 살아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국군이 다시 밀리면서 강원도 원주 서곡리까지 피란을 갔다. “끝도 없이 널브러진 시신을 까마귀가 파먹는 끔찍한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소녀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병대에 의한 돌집 교회 건축을 보면서 절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유하열 권사는 광복 후 “로스케(러시아군)가 읍내에 주둔해 짚단 쌓아놓고 낙법 연습하는 걸 보았다”며 “B-29 폭격기가 읍내를 첫 폭격하는 날 비행기 똥구멍서 뭘 떨어뜨리기에 삐라인줄 알았는데 폭탄이었다”고 회고했다. “북한체제였던 때라 다들 개인 방공호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전쟁 통에도 현 고성군청 앞 ‘하리 우물’ 옆 한 성도 집에서 숨어 예배를 드리곤 했다.

전쟁을 겪은 이들과 함께 문화재로 보존한 ‘하리 우물’ 옆 예배처소 자리를 찾았을 때 한 권사가 한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전쟁을 겪어 봐서 알아요. 전쟁 나면 마실 물 없어서라도 죽을 거예요. 6·25 때는 곳곳에 이런 우물이 많아 살 수 있었어요. 지금은 어림도 없죠. 주께 전쟁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저 전쟁 체험 세대의 ‘깊은 상처’가 아모스 선지자의 음성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국군 공병대, 수복 후 교회부터 짓다

전쟁 직후 모두 가난을 떨치기 위해 육신이 녹도록 일을 했다. 그 지친 몸으로 예배당 가마니 위에서, 마룻바닥 위에서 눈물의 기도를 했다. 그 무렵 서울로 향하는 진부령은 헌병의 통제 아래 교차 통행을 해야 할 만큼 낭떠러지 길이었고, 한번 눈이 오면 지붕까지 닿을 만큼 폭설이었다. “어느 한해 심령부흥회를 다녀오니 자식들이 나가지도 못하고 그 눈을 퍼서 밥해 먹으며 버티고 있더라”고 얘기했다.

“59년 무렵 교육자였던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63년부터 86년까지 23년간 교회 종을 쳤어요. 새벽 4시면 종소리가 바다 한가운데까지 닿아 고기 낚던 어부들이 시간을 알려줘 감사하다고 인사하곤 했어요.”(김연화 권사·83)

“그래도 그때는 형제애가 있어 살 만했어요. 고기만 벗겨도(명태 내장 등을 다듬는 일) 남을 도울 수가 있었으니….”(이신자 권사·74)

“애를 낳으려는데 발에 감각이 없었어요… 교회로 달려가 주님께 매달렸어요. 교회 가면 귀신들이 쫓겨나는 역사가 이뤄지곤 했으니까요.”(유하열 권사·78)

“내가 피부병이 재발하곤 했는데 어느 날 무당집 앞을 지나다 시험을 당했어요. 간신히 떨쳐내고 왔는데 아들이 그래요. ‘어머니 교회에 꾸준히 다니셔야 재발 안 해요’라고 해요. 그 아들이 지금 목사(박유일 영월 문산교회)가 됐어요.”(하광자 권사·72)



미래세대와 통일을 준비하는 목회

이런 어머니의 기도로 부흥한 교회는 70년대 300여명이 출석해 모로 앉아야 할 만큼 좁았다. 그러나 명태 어획이 줄고 젊은이들이 서울로 빠져 나가면서 옛 고을 간성읍성은 인구 5000여명이 좀 넘는 소읍이 되고 말았다. 교회 식구 역시 줄었다. 어렵게 전도해 알곡 성도가 된다 하더라도 서울, 속초, 강릉으로 나가는 이들을 말릴 수도 없다.

“115년을 지켜온 고성지방 모교회입니다. 여기서 신앙 성장을 이룬 이들이 지금까지는 서울로 나갔지만 앞으로는 원산으로 올라가 전도하는 때가 올 겁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간성교회 차준만(49) 담임목사 얘기다. 원산에서 내려온 복음이 선교 루트를 따라 되돌아가며 심령의 처소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한 세기 동안 간성교회는 동해 북부권에 산두, 오봉, 가진, 대대, 동호, 공현진, 고성 교회 등 12교회를 개척·분립 등을 해가며 모교회 역할을 했다.

차 목사와 교인들은 월 2회 간성고 4개반 입시생 모두를 위해 ‘최고급 도시락’을 싼다. 접경 지역 학생들이 통일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러한 그들이 미래를 위해 어떤 비전을 품는가가 교회와 나라의 운명이 달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성(고성)=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