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울의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한강변에 늘어서 있는 말끔한 아파트들과 그 안의 삶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산골에서 십여년을 살다가 수도권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내 나는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살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집을 얻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아파트에서 차지하는 TV의 위상이 매우 흥미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 거실에 놓여 있는 길고 푹신한 의자의 맞은편, 누구에게나 잘 보이는 자리에 TV가 놓여 있었다.
살아보니 아파트라는 곳은 TV 없이는 견디기 힘든 공간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갈 때나 밖으로 나올 때나 언제나 현관에 버티고 서 있는 철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옛날 골목에 늘어서 있던 집들처럼 부엌으로 난 쪽문으로 나가거나 창문으로 몰래 숨어들어올 방법은 없었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TV라는 가상의 통로가 없다면 너무 답답하고 지루해서, 베란다로 달려가 뛰어내리고 싶어지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도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TV 앞에 앉는 게 습관이 되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고, TV에 나오는 물건들을 사고, TV에 나오는 생각들을 생각했다. TV가 없으면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즐거워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고,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TV가 놓여 있는 자리는 내 집의 제단이고,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내가 숭배하는 여신 남신들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그들은 때로는 화려한 막장 드라마를 보여주었고, 때로는 내 삶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신탁을 내려주기도 했다.
이따금 TV 속에서 내가 있는 이쪽의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늘 같은 배경 같은 자리에서 턱을 괴고 앉아 열심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면 햇빛 아래서 문득 뒤돌아볼 때 발밑에 붙어 있는 그림자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다.
부희령(소설가)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아파트와 TV
입력 2015-08-07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