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는데 글자가 하나도 없다. 120페이지 어디를 봐도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제목에도, 목차에도, 서지정보에도 글자가 없다. 책 전체에서 글자라고는 ‘쉬빙’(작가 이름)이 한 차례, ‘헤이북스’(출판사 이름)가 세 차례 발견될 뿐인데, 이마저도 글자라기보다는 하나의 기호처럼 보인다. 글자가 없는 책, 이것은 과연 책인가?
이 책은 글자 대신 그림을 사용한다. 그렇다고 그림책이나 만화책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하나의 그림으로 한 페이지나 한 장면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한 단어를 대체하게 하면서 그림들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문장을 완성해 나간다. 여기서 그림은 상형문자처럼, 혹은 기호처럼 사용된다.
책이 사용하는 자잘한 그림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부호, 기호, 디자인, 심벌, 로고, 이모티콘, 픽토그램, 아이콘 등이다. 보면 “아하, 이런 뜻이구나!” 대충 알게 되는 그런 그림들이다. 저자는 이런 그림들을 ‘심벌 문자’라고 부르며 “이미 보편적인 인식 기초와 문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한다.
사실 한글이나 알파벳, 한자 등 문자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기호이고 심벌일 뿐이다. 책은 글자라는 기호를 그림이라는 기호로 대체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미 공항 같은 국제적인 공간에서는 ‘껌을 휴지통에 버리시오’와 같은 간단한 문장 정도는 그림 기호로 표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올림픽처럼 세계인들이 다 모이는 행사에서도 픽토그램이 흔히 사용된다. 이 책이 놀라운 것은 그림으로 된 기호들만을 사용해 단편 분량의 소설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기호 혹은 심벌 문자로만 쓰여진 세계 최초의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은 샐러리맨으로 검은 색 남자 모습으로 표시돼 있어서 ‘미스터 블랙’으로 불린다. 소설은 오전 7시에서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미스터 블랙의 하루를 다룬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출근하고,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이메일과 SNS를 사용하고, 데이트를 하는 평범한 일상을 다소 유머러스하게 묘사한다. 술 취해 쓰러진 친구를 대신해 술값을 내고, 엄마한테 전화로 결혼 독촉을 받기도 한다.
문자 텍스트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읽는 이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국적이나 사용언어에 상관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심지어 문해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다. 책은 중국어판, 영어판, 불어판으로 먼저 나왔는데 한국어판까지 포함해 어느 판이건 다 똑같다.
쉬빙(60·Xu Bing)은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해석 가능성은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글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도 달려 있지 않다. 다만 당신이 얼마나 동시대의 삶에 깊이 관여되어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쉬빙은 설치작업을 하는 중국의 현대미술가로 주로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실험성 강한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이 몇 차례 전시된 바 있다. 그는 1991년에 영어 알파벳을 한자의 상형문자로 그려내 가짜 문자를 만든 뒤 그 문자로 거대한 크기의 책을 인쇄해 ‘천서(天書, Book from the Sky)’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2012년 처음 발표된 이번 책의 제목은 ‘지서(地書, Book from the Ground)다. ‘천서’가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만든 책이라면, ‘지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든 책인 셈이다.
쉬빙은 전 세계를 돌며 7년간 수집한 심벌과 기호 2500여개를 사용해 ‘지서’를 썼다고 한다. 한국어판의 부록인 ‘가이드북’에 실린 쉬빙의 글은 이 책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현대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읽는 것의 많은 부분이 ‘심벌 문자’이듯 현시대는 다시 상형문자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쉬빙의 책은 그 자체로 매우 실험적인 현대미술 작품이다. 세계 공용어를 만들어 보려는 인류의 오랜 실험 과정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이 작품을 책 한 권 가격에 소장할 수 있는 행운이 우리 앞에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은 오락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은 꽤나 묵직하다. 책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인가?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글자 대신 심벌로 쓴 최초 소설… 내용이 궁금하다
입력 2015-08-07 0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