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은 157㎞다.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은 물론이고 한강 이북 동쪽의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서쪽의 앵산 봉산을 지난다. 한강 이남에서는 구룡산 대모산 일자산을 거친다. 나들이 삼아 슬슬 다니기 딱 좋은 길이지만 얕잡아 볼 수 없다. 주로 낮은 산 능선 위를 걷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하는 오르막이 꽤 있다.
그런데 서울둘레길을 걸으면 많은 구간에서 롯데월드타워를 보게 된다. 전망이 트였다 싶으면 여지없이 나타난다. 용마산과 아차산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해 사당동 남태령 고개를 넘기 직전 구룡산에서까지 볼 수 있다. 서울둘레길뿐이 아니다. 서울시민이 주말에 즐겨 찾는 웬만한 산에서는 다 보인다. 북한산과 도봉산 꼭대기는 인근에서 가장 높으니 당연하다. 팔당댐 남단의 검단산과 북단의 운길산은 물론이고 청평 호명산을 지나 양평 용문산까지 시야에서 빠지지 않는다. 청계산 망경대에서 볼 수 있으므로 개성 송악산에서도 꼭대기에 곤충 더듬이처럼 뻗은 타워크레인이 보일 것이다. 말 그대로 랜드마크다. 언젠가 서울둘레길을 함께 걷던 일행이 한 말이 생각난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게 옛날 롯데 껌 광고 같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경영권 분쟁 발생 9일 만에 일본에서 돌아와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만난 뒤 가장 먼저 롯데월드타워를 찾았다. 그러고는 “한국의 랜드마크를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져 달라” “여러분이 짓고 있는 한 층 한 층이 대한민국 건축의 역사가 될 것이다” “한국 롯데에서 나온 이익금을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고 롯데월드타워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숙원사업이 실현되는 현장에 갔다는 의미가 부여됐다. 하지만 신 회장이 면세점, 신입사원 연수원, 물류센터를 둘러보는 거침없는 행보를 밟자 ‘차별화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형이 아버지를 앞세워 상속과 지분을 논할 때 동생은 경영논리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형이 가족의 가치에 무게중심을 뒀다면 동생은 기업의 비전에 방점을 찍었다. 결전을 앞둔 동생의 전략은 ‘봉건주의 vs 자본주의’라는 콘셉트다. 구체적인 전술도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승부사답다.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사실 형과 동생이 싸우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조선도 나라를 세우자마자 왕자들끼리 형제의 난을 겪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질생활 때 만난 오다 노부나가를 평생 형님으로 모셨지만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재벌가 상속권 분쟁은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어떤 경우는 법정에서 여러 해를 끌었고, 어떤 경우는 기업을 나눠 가지면서 순식간에 끝났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모두 구태의연하다. 가십거리여서 흥미롭지만 롯데그룹에서 일하는 23만명과 그들의 가족도 그럴지 의문이다.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동생이 봉건적 가치에 기댄 형보다 시대적 흐름에서 유리할 수 있다. 그런데 동생의 논리도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구시대적이다. 보릿고개를 없애기 위해 뛰었던 1970년대의 경제개발 논리와 다르지 않다.
지금은 수출액이 얼마고 본사 빌딩이 몇 층이냐보다 지배구조의 투명성이 더 관심사다. 그것이 기업의 미래가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영에 관심을 갖는 소액주주도 크게 늘었다. 이들은 롯데 창업주와 그의 가족들이 롯데그룹 자산 91조원 중에서 얼마만큼을 갖고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경영권을 놓고 다툴 자격이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롯데월드타워는 어디서나 보인다. 하지만 거대한 외벽뿐이다. 그 안을 보여줄 수 있는가. 이것이 롯데 사태의 핵심이다.
고승욱 온라인뉴스부장 swko@kmib.co.kr
[데스크시각-고승욱] 어디서나 보이는 롯데월드타워
입력 2015-08-06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