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神社 앞에 머리 숙였던 한국교회… 그 오욕 씻은 순교자의 피

입력 2015-08-06 00:31
1943년 4월 초 당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일본 나라현의 가시하라 신궁을 참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들의 신사참배 모습.
예장 통합과 합동, 합신,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4개 장로교단 지도자들이 2008년 9월 24일 저녁 제주도에서 열린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장로교 연합감사예배’에서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왼쪽부터 신사참배 반대로 고초를 겪다 순교한 주기철 이기풍 최봉석 최상림 목사와 박관준 장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교회 ‘신앙의 시금석’이었다. 한국교회는 강압적이고도 교묘한 일제의 술책에 넘어가 신사 앞에 머리를 숙인 부끄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죽음을 불사한 채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으로 신앙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변절’과 ‘순교’의 의미를 다시 짚어본다.

◇‘다시 보는’ 한국교회 수치일=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이틀째였던 1938년 9월 10일. 총회 장소인 평양 서문밖교회 안팎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칼을 찬 정복 차림의 일본 경찰들이 회의장 안팎을 포위하고 있었다. 회의장에는 평안남도 경찰국장 등 경찰 고위 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총회대의원(총대)들은 전국 27개 노회(만주 4개 노회 포함) 대표 목사 88명과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등 총 206명이었다.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가 평양·평서·안주 3개 노회 총대 35명을 대표해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했다.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 안주노회장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이어졌다. 그때 블레어(William Blair·방위량) 선교사가 일어나 외쳤다.

“신사참배는 반대해야 합니다.” 2∼3명의 선교사가 잇따라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장내가 술렁거리자 도열해 있던 일본 경찰들이 선교사들의 발언을 막았다. “조선인 대표가 국가에 대한 충성을 피력하기 위해 신사참배 결의를 제안하는데, 국적이 다른 선교사 측에서 이를 저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이어 총회장인 홍택기 목사가 “이 안건이 가(可)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하자 몇 명이 “예” 하고 대답했다. 나머지 한국인 총대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홍 목사는 “아니면 ‘아니오’라고 하십시오”라고 반대 의사를 묻지 않은 채 동의안이 가결됐음을 선포했다.

블레어 선교사 등은 즉각 “불법!”이라고 외쳤다. 평양노회 이승길 목사가 일어나 “선교사 형님들은 발언을 자제하고 자리에 앉으시오”라고 선교사들을 제지했다. 경찰이 선교사들을 강압적으로 퇴장시키자 서기 곽진근 목사가 신사참배 성명서를 낭독했다. 130년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장면으로 꼽힌다.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당시 전체 개신교인 40만명 가운데 70%인 28만명의 성도들이 속해 있던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앞서 감리교는 1936년 6월 제3차 연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했고, 1938년 9월 3일에는 총리사 양주삼 목사 명의로 ‘신사참배를 거행한다’는 성명서를 총독부에 통고했다.

◇“신사참배 회개합니다”…교단들의 공식 회개=2008년 9월 24일 저녁 제주도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장로교 연합감사예배’ 현장. “주여, 신사참배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소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과 합동, 합신,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등 4개 주요 장로교단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70년 전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에 대해 회개했다.

앞서 2006년 1월에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교단 중 처음으로 교단의 친일 행적에 대해 회개했다. 이듬해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3·1절을 기념해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발표했고 그해 9월에는 기장이 정기총회에서 신사참배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13년 제33회 서울연회에서 목회자와 평신도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사참배 회개 결의 건의안’을 채택했다. 신사참배 결의 77년 만이었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5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회개와 자성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며 “한국교회가 늦게나마 공식 회개 움직임을 보인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선언적 고백은 자칫 형식적인 것에 그칠 수 있으므로 깊은 내면의 성찰을 동반한 회개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순교의 피는 식지 않는다=주기철(1897∼1944)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장로회신학교 부흥회에서 ‘일사각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 때문에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가 속한 평양노회는 1939년 말 “교역자로서 국가의식 불응은 총회 결의를 위반하는 행위”라며 주 목사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1940년 9월 투옥된 그는 19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했다.

한국교회의 순교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1930년대와 일제 말기, 한국전쟁기다.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인선교가 활발했던 1930년대에는 동아기독교(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의 손상열 목사가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고,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감리교의 김영학 목사 등이 순교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는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던 1930년대 말부터는 신사참배를 두고 목숨을 건 신앙수호의 영적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주기철 목사뿐 아니라 ‘예수천당’으로 유명한 최봉석 목사가 옥중 순교했고, ‘한국의 사도 바울’로 일컬어지던 이기풍 목사와 ‘신사참배 철회 청원운동’을 펼쳤던 박관준 장로도 하늘나라로 떠났다.

특유의 재림신앙을 강조했던 성결교회도 피해가 컸다. 1943년 전체 교역자가 수감됐고, 박봉진 최상림 목사 등이 신앙을 지키다 하늘나라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등에 따르면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신앙인들 가운데 50여명이 옥사 등으로 세상을 떠나 순교자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임희국 장신대 교수는 “다수가 신사참배에 굴복했지만 한국교회는 소수의 순교자를 통해 그 정체성을 지켰다”면서 “역사는 다수를 통해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도움말 주신 분들=박용규(총신대) 박명수(서울신학대) 이상규(고신대) 임희국(장신대) 교수

◇참고문헌=‘기독교, 한국에 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다림과 서두름의 역사’(장로회신학대출판부) ‘한국기독교회사’(생명의말씀사)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