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싫어도 보게 되고 가려도 힐끔힐끔… 지하철 스마트폰, 민망하거나 불쾌하거나

입력 2015-08-05 02:53

취업 준비생 이모(26)씨는 지난달 13일 서울 지하철에서 불쾌한 일을 당했다. 합정역을 지날 즈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예뿌니’라 저장된 상대와 카카오톡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자기 이번에 만나는데 얼마나 필요해?’ ‘오빠 마음 가는 대로 줘’ ‘장소는?’ ‘신촌역 근처 모텔’ ‘OK. 6시에 보자’라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며 “옆에 남자의 휴대전화가 화면이 큰 기종이라 무심코 보게 됐는데 성매매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직장인 한모(28·여)씨도 최근 퇴근길에 비슷한 사례를 겪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출발해 공덕역까지 이동하는데 바로 앞에 선 남성이 태블릿PC로 한 여배우의 노출장면 모음 동영상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한씨는 애써 눈길을 피했지만 만원 지하철에서 시선 돌릴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한씨는 “남성이 휴대전화를 손으로 살짝 가렸지만 뒤에서 화면이 다 보였다”며 “성희롱을 당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내 스마트폰을 훔쳐보는 시선이 불편한 경우도 많다. 지난달 22일 밤 대학생 박모(23)씨는 외출 후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로 인기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한참을 보다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이 박씨의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화면이 작아 잘 안 보이자 아예 박씨에게 몸을 기댔다. 박씨는 30분 동안 낯선 아줌마와 함께 ‘어색하게’ 드라마를 봤다.

지난 1일 서울의 한 쇼핑몰을 찾은 변모(29·여)씨는 엘리베이터를 탄 채 휴대전화로 이번 휴가철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 섰던 모르는 남자가 변씨의 사진 속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바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는 변씨는 “얼마 전 출근길 지하철에서 남자친구와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노골적으로 쳐다봐 황당했던 적이 있다”며 “통근 시간만 30분이 넘는데 스마트폰을 안 만질 수도 없어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4000만명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스마트 피핑(peeping·엿보기)’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누구나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도중 타인에게 사생활이 노출될 가능성을 안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보고 싶지 않은 타인의 사생활이나 야한 사진 등을 ‘강제로’ 목격해 불쾌했다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개인들은 발 빠르게 움직인다. 직장인 김모(38)씨는 화면이 큰 휴대전화로 기종을 바꾸면서 글씨 크기를 ‘보통’에서 ‘아주 작게’로 조정했다. 김씨는 “글씨가 작아 눈이 더 아프지만 누군가 내 정보를 훔쳐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대학생 정모(26·여)씨는 ‘프라이버시 필터’라는 무료 앱을 이용한다. 화면을 흐리게 만들어 주변 사람이 스마트폰 액정을 쉽게 볼 수 없도록 하는 원리다. 액정 보안 필름도 인기다. 1만원 안팎의 필름을 부착하면 정면으로 보지 않을 때 화면이 검게 변한다. 종로에서 휴대전화 액세서리점을 운영 중인 김모(35)씨는 “보안필름을 찾는 손님 중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쳐다보는 게 불쾌했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꾸준히 찾는 손님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고객의 꾸준한 요청에 통신업체도 ‘휴대전화 훔쳐보기 차단’에 나섰다. SK텔레콤은 최근 출시한 한 스마트폰 기종에 ‘T 안심스크린’ 기능을 탑재했다. 친구와의 비밀 대화, 개인적인 동영상 시청 등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 시선차단 기능을 작동시킬 수 있다. 밝기를 어둡게 하거나 색상을 흐리게 만들어 다른 사람이 보기 어렵게 하는 기능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고객 조사 때마다 관련 불만과 민원이 많아 새롭게 기능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휴대전화 ‘관음증’을 막을 ‘방패’가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은데도 봐야 하는 ‘노출 폭력’을 해결할 방법은 전무한 상태다. 이에 대해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배려 없이’ 사적인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세환 전수민 조효석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