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권순웅] 치사하게 살자

입력 2015-08-05 00:25

우리나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이 있다. ‘치사하게 산다’는 말이다. ‘치사(恥事)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행동이나 말 따위가 쩨쩨하고 남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치사(恥事)함’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 ‘치사(致死)’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대열에 참여하는 자가 있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국가정보원 직원, 기업의 총수 장로, 인기 연예인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고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유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지면으로 언급하는 것이 죄송할 뿐이다.

김훈 작가의 ‘공무도하’라는 소설이 있다. 원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중·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백수 광부가 물속에 빠져 죽자 그의 아내가 이를 슬퍼하다가 함께 물에 빠져 죽는다는 내용이다. 우리 고대문학은 이것을 예술로 승화했다. 소위 한(恨)문화다. 그런데 소설가 김훈은 또 다른 관점에서 조망했다. 소설에서 장철수가 노동운동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단작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이다.”

작가는 치사한 인생,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치사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따지자면 성경에 다윗보다 더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사울 왕의 사위였다. 차기 대권후보다. 그런 사람이 추노 같은 도망자가 되었다. 다윗은 적장 아기스왕에게 한 생명을 유지하려고 일신을 의탁한다. 부하들이 알아볼까 해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한다. 얼마나 치사하고 졸렬한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봉두난발(蓬頭亂髮)하여 도망간다.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 다윗을 향하여 “비루(鄙陋)한 자”라고 저주를 한다. 만일 다윗이 자살을 생각했다면 수십 번 목숨을 끊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 고통 중에 계시의 말씀 시편이 나온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에 한 말씀도 이 시편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치사하게 살자’를 이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치는 치열하게 살자는 것이고, 사는 사랑하며 살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보았다. 파독 광부와 간호원의 러브스토리가 나왔다. 탄광에 묻혔다가 살아난 주인공, 시신을 닦으며 눈물의 빵을 삼켰던 여주인공의 모습이 감동을 준다. 그들은 영화감독의 부모들의 모습이었다고 증언한다. 주인공 덕수는 윤제균 감독의 아버지 이름이고, 영자는 어머니가 집에서 불렸던 이름이다. 이 영화는 윤 감독이 치열하게 살아온 앞 세대에게 드리는 헌사라고 한다. 좁은 땅, 힘없는 약소민족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민족에게 주신 선물은 치열하게 사는 DNA라고 본다. 이 선물을 잘 사용해야 한다.

또 사랑하며 살자는 것이다. 대구 계성학교의 설립자인 아담스 선교사. 그가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을 때 전염병 때문에 너무나 참혹한 상태였다. 천연두로 죽은 아이들을 담장에 널어놓았다. 그래야 손님마마가 떠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무지한 은둔의 나라 조선을 사랑했다. 교회를 짓고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아담스 선교사뿐 아니라 후손들 38명이 100여년 동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 민족을 섬겼다. 그것은 그들의 고귀한 사랑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여, 치열하게 살고 사랑하며 살자.

권순웅 목사(동탄 주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