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8) 감리교회 밖에서 사역 계속

입력 2015-08-04 00:56
윌리엄 스크랜턴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07년 6월부터 의사로 일했던 국립병원 대한의원 전경(왼쪽). 스크랜턴이 조직한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 관련 기사가 당시 ‘THE KOREA MISSION FIELD’에 실렸다. 이덕주 교수 제공

1907년 6월 감리교 연회에서 선교사직을 사임한 윌리엄 스크랜턴은 22년 선교 활동의 현장이었던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후 10년을 더 한국에 머물렀다. 선교사직을 사임했다면 더 이상 머물러야 할 명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대한의원에서 일하게 된 아들 스크랜턴

첫째는 그의 연로한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 때문이었다. 75세였던 메리 스크랜턴은 선교사직을 사임한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서울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부터 ‘내가 묻힐 곳은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 스크랜턴은 어머니 곁에 있어야 했다. 어머니는 결국 소원대로 2년 후(1909년) 서울 달성궁 사택에서 별세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아들 스크랜턴은 모친 별세 이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8년을 더 한국에 머물며 의료 사역을 감당했다. 극친일파 해리스 감독과 본국 선교본부, 한국선교회와 갈등으로 선교사직을 사임했어도 그에겐 한국교회와 한국인을 위해 일할 자리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간접 선교’로 알고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이것이 그가 한국을 떠나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였다.

이런 그에게 서울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말 대한제국 정부에서 설립, 운영하는 대한의원 촉탁(고문) 의사 겸 교육부 교관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스크랜턴이 대한의원과 3년 기간으로 고빙(雇聘) 계약을 체결한 것은 1907년 6월 16일이었다.

대한의원은 국립병원이자 의학 교육기관이었다. 한국에서 서양 의술로 운영하는 국립병원은 고종황제의 특명으로 1885년 4월 북장로회 선교사 알렌이 시작한 광혜원이 그 기원이다. 설립 직후 이름을 제중원으로 바꾼 이 병원은 통리교섭사무아문 관할인 ‘국립병원’이었다. 그러나 미 북장로회 해외선교부가 파송한 선교사가 운영했다는 점에서 ‘선교병원’이기도 했다.

제중원은 이후 의료 선교사 헤론과 하디, 빈튼을 거쳐 1893년부터 에비슨이 담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점차 선교병원으로서 종교적 사역이 증가했다. 그러다 미국 독지가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이라 했고 병원 안에 설립한 의학교에서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오늘의 연세대학교 의대로 발전했다.

제중원이 선교병원으로 성격을 분명히 해나감에 따라 정부에서는 별도의 국립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1899년 3월, 관훈동에 학부(學部) 관할의 관립의학교를 설립하고 지석영을 교장으로 선임, 경복궁 영추문 밖(사간동)에 내부(內部) 관할의 내부병원을 설립했다. 내부병원은 1900년 재동으로 옮기고 이름을 광제원으로 변경했다. 그러다가 1902년 관훈동의 관립의학교가 부속병원을 설립했고 1905년 10월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되면서 내부병원이 있던 경복궁 영추문 밖에 ‘황실병원’ 명목의 적십자병원을 설립했다.

국립병원은 이렇게 광제원과 부속병원, 적십자병원 등 3개였다. 이후 1907년 3월 이들 병원을 통합한 대한의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창경궁 부속 함춘원(경모궁) 자리(현재 연건동)에 현대식 2층 병원건물을 건축했다. 이로써 대한의원은 단일 국립병원으로 출발하게 돼 치료부와 교육부, 위생부 등 3개 부서제로 운영됐다.

스크랜턴은 당시 대한의원 원장이자 내부 대신인 임선준과 대한의원 촉탁 의사이자 교육부 교관으로 고빙계약을 맺었다. 병원장은 명목상 내부 대신인 임선준이었지만 실제로는 통감부에서 파견한 의사 사토오가 부장 직책으로 병원과 의학교를 운영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통감부 병원’이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인의 손에 넘어간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관료의 지휘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지만 스크랜턴은 한국인들을 치료하고 한국인 의사를 양성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의료선교사회 설립

스크랜턴은 이와 함께 ‘교회 밖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교 사역을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속했던 감리교회가 필요로 하고 요청하는 사역에 기꺼이 응했다. 그를 아쉽게 떠나보내야 했던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스크랜턴은 한국선교회의 ‘조력자’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그는 상동교회뿐 아니라 그가 장로사로서 사역했던 지방교회들도 필요한 경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공주에서 활동하던 스웨어러 선교사가 1907년 7월 급성질환(뇌일혈)으로 쓰러져 위기에 처했을 때 응급조치를 취하고 장기 요양 의견을 냈다. 스웨어러는 당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쓸 수 없었고 말이 어눌하고 안면 마비 상태에 이르렀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의 소견에 따라 선교부는 스웨어러에게 휴식을 허락했다. 스웨어러는 1년 6개월 동안 쉬면서 건강을 완전히 회복, 1909년 4월 다시 선교지로 귀환할 수 있었다.

스크랜턴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교 사역의 의미를 담아 추진한 일은 ‘한국의료선교사회’ 설립이었다. 1907년 연말에 조직된 것으로 보이는 의료선교사회는 한국에서 일하는 의료 선교사들이 친목과 교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초교파 모임이었다.

초대회장은 스크랜턴이 맡았고 서울과 각 지방에 지부를 두어 활동했다. 조직 1년 만에 한국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의료 선교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이에 따라 지부 조직도 확대되면서 명칭도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로 바꾸었다.

한편 윌리엄 스크랜턴은 선교사직 사임 이후 감리교를 떠나 영국 구세군으로 교적을 옮겼다. 감리교회에 연원을 둔 구세군이 한국 선교를 시작할 때 스크랜턴이 구세군 선교에 참여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10년 가을부터는 영국 성공회로 다시 교적을 옮겼다. 성공회는 감리교회가 파생돼 나온 모체 교파였다. 그는 1922년 일본에서 별세할 때까지 성공회 교적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감리교회와 완전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감리교회나 선교사들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고 ‘자유교인’으로서 교파를 초월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역에 전념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