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보다 100년 앞서 세속 교회 권력에 성경 진리로 맞서… 종교개혁자 얀 후스 순교 600주년

입력 2015-08-03 00:15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에 위치한 얀 후스 동상 모습.
지난달 6일, ‘서거 600주년 특별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카를대학에 설치돼 있다. 이상훈 목사 제공
전(前) 종교개혁자 얀 후스(사진·1372∼1415)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더구나 독일이나 프랑스, 스위스도 아닌 체코에서 종교의 개혁을 주창하다가 교황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받아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 인물에 대해서는 교회사(史) 전문가들이 아니라면 딱히 다가오지 않는다. 지난달 6일은 그가 순교한 지 6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체코 프라하 현지에서는 '얀 후스 순교 600주년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한국에서는 예장 통합 산하 신학대 교수들과 지역교회 목회자들로 구성된 40여명의 대표단이 참석해 후스의 삶을 되돌아봤다. 대표단 중 한 명이었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 이상훈(화음교회) 목사가 후스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폈던 후스

“인간적으로만 보자면 얀 후스의 운명은 가장 비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활동하다 순교했습니다. 그의 선구적 종교개혁 사상은 체코 민족의 형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고, 이는 그가 세속 권력에게 미움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신학 그룹의 지원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삶과 희생은 우리에게 악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고 선이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난달 5일 체코 프라하의 꼬빌리시교회(이종실 류광현 손신일 선교사 협력사역) 주일예배. 폴란드 개혁교회 비숍 마렉 이즈데브스키 목사는 이날 설교에서 시편 27편을 본문으로 오늘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기억해야 할 후스의 순교를 이렇게 되새겼다.

얀 후스 초기 생애를 보면 주목받을 만한 요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체코 후스교회 총주교인 토머스 부타가 쓴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동연출판사)에 따르면 매일의 양식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해야 했던 어린 시절이 그가 회상하는 유년기였다. 특별히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을 돌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실제로 그는 어머니의 기도처럼 사제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당시 교회와 사제가 갖고 있던 명성을 얻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고향을 떠나 프라하로 가게 된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황제 카를 4세가 세운 카렐대학에 입학해 학업에 힘썼고 마침내 카를대 교수가 됐다. 1409년에는 총장직까지 오르는 성취를 맛본다. 취임 연설에서 그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을 믿고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1402년 대학의 채플이었던 베들레헴 강단의 설교자로 임직을 받고 말씀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애쓰며 그 말씀을 선포했다. 그의 유명한 설교 ‘내가 성경을 알았을 때’에서 후스는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토로했다. “나는 어렸을 때 빨리 사제가 되어 좋은 집에 살며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게 되면서 그것이 악한 욕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지 예전(禮典)을 위해, 혹은 직업적 성직자로서 성경을 의례적으로 사용했던 사제가 아니었다. 그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고 또 그 말씀을 따라 스스로를 ‘쳐서 복종케 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권위의 유일한 원천은 성경

능력의 말씀을 경험한 후스에게 당시 가톨릭교회의 행태는 성경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말씀을 맡은 거룩한 직분이 돈으로 매매되기 일쑤였고(성직매매), 성만찬은 떡만 나누는 ‘일종(一種) 성찬’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수도사들의 성적 문란도 심각했다.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는 영국의 위클리프가 주장했던 성경의 권위를 회복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이에 대한 실천적 따름으로 자신의 회중들에게 주님의 떡과 피를 모두 기념하는 ‘이종성찬’의 예전을 베풀었고,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라틴어 대신 알기 쉬운 체코어로 설교했다. 이 같은 그의 교회를 향한 강력한 회개의 촉구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1412년 프라하에서는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가 판매되었고, 후스는 성무금지령의 처분을 받게 된다. 결국 그는 정들었던 친구들과 제자 그리고 회중들을 떠나 시골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때로는 들에서 때로는 시골의 농가에서,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거리의 설교자’로 변신한다. 그리고 마침내 1414년 말, 보덴 호숫가에 위치한 ‘콘스탄츠 회의’에 출두 명령을 받게 된다.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몇 주 일 뒤 12월 6일 도미니칸수도원의 지하 감옥에 투옥된다. 후스를 심리하는 배심위원회가 교황 요한 23세의 참석 아래 1414년 12월 4일에 결성됐고, 추운 겨울을 감옥에서 보낸 후 이듬해 7월, 회의는 속개된다. 공개석상에서 논의된 주제는 주로 ‘권위의 출처’ 문제였다. 후스의 반대파들은 공의회의 결의에 권위의 궁극적 원천이 있다고 주장한 반면, 후스는 ‘권위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경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침내 7월 6일 소집된 전체회의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사형선고를 언도 받았다. 그날 그는 콘스탄츠의 외곽에서 화형을 당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이상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