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은 언제 생겨났을까 궁금하시죠?… 한국미술 전시공간 역사展

입력 2015-08-03 02:42
1933년 덕수궁 석조전에 들어선 이왕가미술관 서양화전시실의 전경. 여성 누드화가 진열돼 당시 한국인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던졌다. 누드화는 인체 비례 등에 대한 관찰력과 데생력이 뛰어나야 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은 장르였다. 이왕가미술관은 일본 작가 작품 위주로 구입하고 한국인 작가는 배제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 ‘호암 수집 한국미술특별전’ 도록 표지(위)와 1970년 현대화랑 개관기념전 포스터.
조선시대 그림 감상은 양반 계층이 누리던 고급 문화였다. 18세기 이후 의관, 역관 등 중인 계층으로 확산되긴 했지만 상민은 언감생심이었다. 유명화가의 그림은 그 때도 집 한 채 값을 치러야 할 정도로 비쌌고, 감상 자체도 사랑방에 둘러앉아 그들끼리만 나누는 계급적 문화였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계층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화랑과 미술관 같은 전시공간은 언제 생겨났을까.

서울 종로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이런 궁금증을 풀어줄 ‘한국미술 전시공간의 역사’전을 열고 있다. 국내 첫 화랑은 서화가 김규진이 1913년 서울 소공동에 차린 ‘고금서화관’이다. 영친왕의 서예 가정교사를 맡을 만큼 잘 나가던 그는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났다. 자신의 집 행랑에 ‘천연당사진관’을 열었고 몇 년 후에는 서화관까지 낸 것이다. 지전, 서점 등에서 민화류를 취급하긴 했지만 고금서화관에 와서야 비로소 제법 이름 있는 서화가들의 작품이 전문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작가를 발굴하고 기획전을 여는 본격적인 화랑의 기능을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그림 전문 판매점에 가까웠다.

1910년대 이후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등 서양화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땅한 전시 공간이 없어 학교 강당, 종교시설, 신문사 강당이 사용됐다.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이 당시 경성에서 첫 서양화 전시회를 연 곳도 경성일보사 ‘내청각’이었다

1930년대 들어 지금과 같은 본격적인 미술관 및 화랑의 시대가 열린다. 덕수궁 석조전 신관에 만든 이왕가미술관(1933), 경복궁에 세워진 조선총독부미술관(1939)에서 서양화 전시가 상설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왕가미술관에서 여성 누드화가 버젓이 전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진은 흥미롭다. ‘모던 경성’의 상징 백화점에서는 1930년대 후반 들어 갤러리를 열었다. 화신백화점 갤러리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당선된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1937년 ‘선전(鮮展) 특선 작가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소장자료와 국가기록원, 국립고궁박물관 등 21개 기관의 대여 자료 250여점으로 전시공간의 발달사를 보여준다. 사진과 도면, 책자 등이라 다소 밋밋하지만 ‘읽는 전시’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해방 이전의 경우 자료의 한계로 공공미술관 위주의 전시라서 아쉽다.

해방 이후로 가면 민간 화랑의 발전사가 보다 풍부한 자료를 통해 소개된다. 1975년 인사동 문현화랑에서 열린 ‘박수근 10주기전’, 1986년 민중미술 진영의 전시공간 ‘그림마당 민’에서 열렸던 ‘오윤 판화전’, 1999년 대안공간 풀의 개관기념전 등의 전시 포스터와 리플릿을 통해 시대의 변천사까지 읽을 수 있다.

호암미술관이 설립되기 전인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호암 수집 한국미술특별전’이 개최된 사실도 도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표지의 신라시대 금관이 화려하다. 전시는 연대기 순이 아니라 박물관, 미술관, 화랑, 대안공간 등 전시공간을 종류별로 보여준다. 10월 24일까지(02-730-6216).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