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그림산책] 예술과 신앙의 행동인, 화가목사 이연호

입력 2015-08-01 00:19
이연호, 이촌동 풍경(1952)
이석우(겸재정선미술관장·경희대 명예교수)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역사를 통하여 일하고 섭리하시는가? 사람을 통해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을 택하여 역할을 부여하고 사람은 그 소명을 따라간다는 의미가 된다.

화가목사 이연호(1919∼1999)의 삶과 예술을 보면 그가 소명을 충실히 따라 살았던 인물임을 알게 된다. 1919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한 그는 극심한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삶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생의 기준을 세상의 것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 물었고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어린 시절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 그림 소질을 인정받게 된 시기다. 그토록 사고 싶었던 성경책을 산 기쁨과 가난 때문에 이를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을 때 어머니와 나눈 대화는 눈물 없이 읽어내려갈 수 없다.

두 번째 춘천고등학교 시절 일제의 강압에 저항, 민족자존운동을 전개했던 ‘상록회’ 사건으로 4년이 넘는 옥고를 치러야 했던 시기(1939∼1943). 그는 오직 믿음으로 참 용기를 보여줬다. 세 번째 단계는 가난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촌동을 중심으로 빈민 목회를 했던 시기다. 이는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유동식 교수는 “이연호의 일생은 빈민들과 더불어 산 것이고 이것이 그의 목회의 전부였다”고 말한다.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육체적으로 병들고 정신적으로 빈곤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의 신조나 교리가 아니다. 이연호는 ‘구부러진 화젓가락’(‘사랑’ 1947년 4월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제도 너는 떨어졌으나 가방을 들고, 헤어졌으나 외투를 입고 그들의 앞을 지나오지 않았던가? 나는 자기의 생활이 그 이하로 낮출 수 없는 최저의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쩐지 그들을 대할 때마다 그들에게 죄를 짓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다.’

여기 소개한 ‘이촌동 풍경’(1952) 그림은 그 무렵의 가난한 우리 삶을 닮았다. 그 하단 중앙에 서 있는 분이 이연호 목사일 것이다. 이 작품 외에도 그는 ‘이촌동의 판잣집’(1960), ‘서부이촌동 철거의 날’(1967), ‘철거 후 이촌동 풍경’(1969) 등을 그려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그는 렘브란트와 뒤러를 특히 좋아했다. 그의 그림에는 이들의 화풍이 느껴지기도 한다.

일생을 그려온 그림이고 개인전도 하고 국전에도 입선(1961)하며 장로회신학대학 등에서 미술사 강의를 오랫동안 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 미술 확산을 위해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1966)하고 그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최대 관심은 ‘한국 기독교 미술은 가능한가’였던 것 같다. 이연호는 한국 교회가 십계명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제2계명을 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것에 실망했다. 종교개혁 때 일부 우상적인 교회 이미지를 파괴했던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루터는 크라나호(1472∼1553)라는 화가의 도움을 받았고,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 하나만으로 선교의 역할을 크게 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창조적 달란트와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표현하는 은총을 주셨다. 언어에만 의존하고 상징과 창조미, 문화적 트렌드를 외면하는 기독교가 언제까지 한국 교회를 이끌 동력을 가질지 물어봐야 한다. 작은 것 하나에도 담긴 하나님의 창조 신비와 아름다움을 더 깊이 감지하기 위해서는 미술, 예술에 더 애정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석우(겸재정선미술관장·경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