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 청산의 길] 지우거나 새기거나, 克日 두 갈래
입력 2015-08-01 02:56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일제가 남긴 건물들과 친일파를 찬양하는 비석을 철거하고 친일파의 묘를 이장시키거나 일본에서 건너온 향나무를 뽑아내기도 한다. 일본식 지명과 지적·임야도의 기준을 바꾸는 노력도 펼쳐지고 있다.
대구·경북에서는 생활 속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현충시설·관공서·학교·공공장소의 일본향나무(가이즈카) 교체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해 12월 ‘현충시설 등 일본향나무 교체에 관한 청원’이 경북도의회에서 가결됐다. 이어 지난 5월 6000만원을 추경예산에 반영한 뒤 지난 6월부터 일본향나무 교체 사업을 시작했고, 연말까지 교체를 마치기로 했다. 도는 우선 현충시설 내 일본향나무부터 우리 향토 수종으로 교체하고 있다.
대구시교육청도 일본향나무 없애기에 동참했다.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가 대구 방문 기념으로 달성공원에 일본향나무 두 그루를 심은 것을 시작으로 행정관청, 학교, 주택 등에 집중적으로 심어졌다. 대구 지역 초·중·고교 50여곳에 1000여 그루, 경북 지역 10여개 시·군 400여곳에 1만여 그루의 일본향나무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시교육청은 전체 초·중·고·특수학교(441곳)에 일본향나무가 교목일 경우 이를 교체하라는 요청 공문을 보냈다. 또 학교 상징물이나 국기게양대 주변의 일본향나무를 우선 제거하고 무궁화를 심도록 했다.
대전시는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지적·임야도의 등록 원점 체계인 ‘동경측지계’를 2020년까지 전 세계가 표준으로 사용하는 ‘세계측지계’로 변환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측지계’(測地係·Geodetic Datum)는 지구 형상과 크기를 결정해 곡면인 지구의 공간정보(지형·지물)의 위치와 거리를 나타내기 위한 기준이다. 우리나라 지적·임야도 등 지적공부는 일제 때인 1910년 토지조사 때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동경 원점 기준인 동경측지계를 사용하고 있다. 동경측지계는 세계측지계보다 약 365m 북서쪽으로 편차가 발생한다. 시 관계자는 “일제 잔재가 청산됨으로써 행정의 공신력이 높아지고 정확한 국제규격의 공간자료 개발로 시민 재산권 관리의 편리성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충북 청주향교에는 일제 강점기 충북지사와 청주군수를 각각 지낸 친일파 김동훈과 이해용을 찬양하는 내용의 존성비(尊聖碑)를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다. 문제의 존성비는 향교 주차장에 있는 5개의 존성비 중 2개로 1939년 동시에 세워졌다. 김동훈은 일제의 관립 일어학교를 나와 충북도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까지 지낸 친일 관료다. 진천·음성 등의 군수를 역임한 이해용은 1919년 4월부터 5월까지 경기도 강화지역에서 발생한 3·1운동 관련자들을 심문하고 1940년 4월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청주향교 측은 조만간 이들의 존성비를 철거할 예정이다.
그런가하면 1905년 6월 충주 농공은행 설립 위원 등으로 활동한 친일파 민영은이 친일 행위의 대가로 챙겼던 충북 청주 도심의 땅은 국가 귀속 절차가 진행 중이다. 민영은의 후손 5명은 2011년 3월 청주시를 상대로 민영은 소유 토지 12필지에 대한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항소심에서 패소하자 상고를 포기했다. 민영은 땅 찾기 소송은 친일재산조사위의 국고 환수 대상에서 빠진 토지를 친일 재산으로 인정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청주 국유지에 있던 친일파 민영휘 증손자의 묘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됐다. 청주시는 산성동 야산에 조성된 친일파 민영휘의 증손자 묘지와 가묘 4기를 오는 11월 31일까지 이장하라는 복구 명령을 내렸다. 이 분묘는 국가 귀속 이전인 1981년 조성된 것이다. 이 부지(44만1000㎡)는 원래 민영휘의 소유였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리면서 2007년 12월 소유권이 국가로 귀속됐다.
최근 경기도 군포시에선 친일 작가 이무영 지우기가 진행됐다. 친일 잔재가 철거된 곳은 군포시 산본2동 능안공원이다. 이곳에서는 지난 22일 ‘군포장 깍두기’ 등의 작품을 발표한 농민문학가 이무영의 작품비가 친일 작가라는 이유로 철거됐다.
울산시는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1906년 해안을 밝히며 선박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던 울기(蔚岐)를 울기(蔚氣) 등대로 바꿨다. 예전에 사용한 울기(蔚岐)는 1906년 일본이 명칭을 붙인 것이다. 동해 쪽으로 뾰족하게 나온 부분을 ‘울산의 끝’으로 명명한 데서 비롯됐다. 울기(蔚氣)는 울산의 새로운 기운을 염원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인천지역에서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을 대표하는 송도국제도시를 둘러싸고 송도가 마쓰시마라는 한자 표기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지명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강원도에선 친일파인 이범익 전 강원도지사의 행적을 알리는 단죄문 설치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13년 8월 15일 춘천시 소양로 비석군에 이범익 단죄문이 설치됐다. 이범익 단죄문설치추진위원회는 단죄문에서 “조선시대 관리인들의 공덕비를 모아 놓은 이 비석군에 일제 강점기 대표 친일파인 이범익의 비석이 포함된 것은 잘못됐다”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강원도민의 뜻을 모아 광복 68주년을 기념해 단죄문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1929∼1935년 강원도지사를 지낸 이범익은 조선총독부 정책을 앞장서서 옹호해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특히 1938년 9월에는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 172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고문한 부대인 간도특설대 창설을 제안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이범익의 공적비는 정선군 정선읍 아라리촌 내에도 세워져 있다. 이 공적비는 1932년 당시 정선군수 김택림이 세운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김택림은 정선 신작로 완공 행사에 이범익이 참석하자 이를 기념키 위해 비석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 옆에도 친일 행각을 꼬집는 단죄문이 나란히 서 있다. 정선문화연대와 지역 주민들은 후세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키 위해 2013년 3월 단죄문을 세웠다.
전북 전주시는 덕진공원 일대의 일제 강점기 잔재를 전면 조사하고 있다. 덕진공원 안에는 1917년 친일파 박기순이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덕진연못 주변에 건립한 취향정(醉香亭)과 1934년 일본인 전주읍장(후지타니 사쿠지로)이 전북대 학생회관 옆에 세운 덕진공원지비(德津公園之碑) 등이 있다. 전주시는 이 정자와 비석을 철거하든지, 이전 또는 존치할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시는 앞서 시민단체와 함께 2005년 친일 잔재 청산 차원에서 취향정 앞에 박기순의 친일 행적을 적은 안내판을 설치했다. 또 친일파 김연수의 아호를 딴 종합경기장 현판 ‘수당문’을 철거했다.
서울시가 국세청 남대문별관을 철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제가 1937년 덕수궁 기운을 해치기 위해 지은 건물이 국세청 남대문별관으로 이용됐었다. 서울시는 이 자리에서 다음 달 17일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조성한 시민광장 개장식을 갖는다.
광주=장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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