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민태원] 메르스와 지피지기

입력 2015-07-31 00:20

“지피(知彼)도, 지기(知己)도 못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국회 메르스대책특별위원회에 참석해 이렇게 답했다. 그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며 메르스 사태 초기 방역에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적은 물론 자신까지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보건 당국이 그랬다. 중동 사막에서 활개치던 보이지 않는 적을 잘 몰랐고, 방비책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결국 바이러스와의 전쟁 초기 백번을 싸워 판판이 깨졌다. 온 국민이 두 달 넘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메르스 확산으로 국가 방역체계의 허점과 의료계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데 현재 정부와 전문가, 국회,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논의되고 있는 감염병 대응 문제점과 해결 방안의 상당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9년 신종플루를 경험한 후 2010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신종플루 발생 대응 운영 백서’(2009.11.3∼12.10)를 발간했다. 이 백서 제6장 중앙대책본부의 운영 성과와 향후 과제 중 260쪽부터 시작하는 ‘전염병 관련 개선과제’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온다.

먼저 전염병 대응 문제점들이 조목조목 정리돼 있다. ‘전염병 발생 시 유행 상황을 정확히 예측할 전담 인력과 도구가 부족하다. 감염 의심자를 격리 관찰할 시설이 부족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역학조사관도 시·도별로 1∼2명에 불과하다. 검사 결과 활용을 위한 정보공유 시스템이 미비한 실정이다.’

개선 과제도 일목요연하게 나열돼 있다. 국가격리시설 건립과 지방자치단체별 격리 외래실·중환자시설 확충, 검역 조기 경보체계 및 접촉자 추적관리 시스템 마련, 지자체별 전염병 감시대응 요원 확충, 고위험 병원체 관리·연구시설 건립, 신종 전염병 상황별 시나리오에 따른 대응 매뉴얼 구축, 병원간·병원-약국간 등 정보공유를 위한 민간협력 시스템 구성 등이다.

6년 전 신종플루를 겪으며 발생한 문제점과 대책이 마치 평행이론처럼 똑같다. ‘신종플루’라는 주어나 목적어를 ‘메르스’로 바꾸면 되는 수준이다. 한 전문가는 “현재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근본적 방법들”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뭘 한 걸까요?”라며 혀를 찼다. 지난 6년 가까이 ‘지피지기’할 기회가 분명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는 후회가 묻어난다.

결국 얼마나 개혁시킬 의지가 있는가, 정말 변화하려는 각오가 돼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환골탈태 수준의 개혁이 아니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더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문제는 방향이나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않고 그냥 둔 것이 화근이었다. 메르스 사태로 항간엔 감염병 6년 주기설이 떠돌았다.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2009년 신종플루에 이어 올해 메르스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어쨌든 최근 전 세계 신종 감염병 유행 추세를 볼 때 이 같은 주기는 더 빨라질 게 뻔하다.

정부는 ‘사실상 메르스 종식’을 선언했다. 다음달 국가 방역체계 개편 방안을 내놓고 ‘메르스 백서’도 준비 중이다. 여기에 6년 전 신종플루 백서에 담긴 내용들이 그대로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아울러 제2, 제3의 메르스가 닥쳐왔을 땐 보건 당국 수장의 입에서 ‘지피지기했더니 백전불태였다’(知彼知己 百戰不殆·적과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길 기대한다. 민태원 사회부 차장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