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그냥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입력 2015-07-31 00:20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것이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 거나 먹고 입으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남자애들이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는 여자애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애들은 모험을 하는 대신 사랑을 위해 뭔가를 기다리거나 시련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어쩐지 내 이야기 같지 않았다. 여자 주인공들은 예쁘지 않으면 착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나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했던 이야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여자라서, 라스무스나 허클베리 핀처럼 세상을 방랑하면서 온갖 모험을 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는, 그래서 삶의 지혜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쉽게 허락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알게 된 게 아니라 얻어들은 말들이었지만, 여자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다고들 했다.

나는 기다리던 아들 대신 엉겁결에 태어난 딸이었지만, 동기간에 남자라고는 없었기에 남자와 여자에 대한 대접과 기대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자랐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차이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남자애들을 선망했고 여자애들을 낮춰보기도 했다. 남성적이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여성적이고 싶지도 않았다. 내 의견을 말하거나 너무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남들의 눈총을 받았다. 상냥함이나 남을 돌보는 능력은 여성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부끄러웠고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단순히 인간의 미덕이라고 불릴 만한 성향들이었다. 누구에 의해 주입된 것인지 모를 여성성 남성성의 구별 탓에 내 삶에 있었으면 좋았을 소중한 것들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예전에 “그냥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다. 이따금 나도 소리치고 싶다. “그냥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