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노동자의 과잉친절, 너무나 한국적인…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입력 2015-08-07 02:39
노동경제학자로 2000년부터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근무해온 이상헌 박사의 첫 책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는 국제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경제 현실과 노동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 생각의힘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ILO)에서 한국인으로는 최고위직인 사무차장 정책특보로 일하는 이상헌 박사가 한국어로 쓴 첫 책이다. 한국의 경제 현실과 노동 상황에 대한 가벼운 비평집이다.

이씨는 노동경제학자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0년부터 ILO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난 2010년 채택된 ‘ILO 가사노동협약’의 초안을 성안한 인물로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협약은 가사 노동자의 권리를 일반 노동자와 동등한 수준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근래에는 소득 분배 개선이 사회적 통합이나 정치적 안정 뿐 아니라 경제성장률 제고와 경제안정성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소득주도 성장론’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최근 새로운 경제담론으로 들고 나온 바로 그 주제다.

제네바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다소 감정적인 필치로 쓴 이씨의 글들은 여전히 성장담론이 주도하는 우리 사회에 불평등과 분배, 노동권 등의 이야기를 공급한다.

책 제목이 된 글에는 쉬는 시간이면 구석에서 책을 꺼내 읽는 네덜란드 항공사 KLM 승무원과 항의하는 고객을 달래기 위해 무릎을 꿇는 한국 국적 항공기 승무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씨는 “고객도 기업도 노동자의 영혼을 요구할 권리도, 파괴할 권리도 없다”며 “정형화된 과잉 친절을 직원에게 강요하는 기업을 거부하고,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 우유 배달원이 미안해야 하는가’라는 글은 ‘배달사원 승강기 사용 자제’라고 경고문을 붙힌 강남의 어느 아파트 단지 얘기를 다룬다. 이씨는 이 문제를 인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일상의 권력 관계가 발현된 모습”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자신도 모르게 깊숙이 스며든 ‘저 배달원과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은 저 싸구려 경고문의 숨은 공모자다”라고 아프게 지적한다.

이상헌의 시각이 갖는 매력은 국제적인 기준에서 우리 경제와 노동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노동시간, 최저임금, 임금상승, 파업 등 여러 이슈들에 대해 그는 세계적인 사례들과 최신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편견을 허문다.

‘노동자는 정말 게으른가’라는 글을 보자. 이씨는 외국의 연구 결과들을 보여주면서 “내 월급이 불공평하게 낮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월급을 올려주면, 이들의 노동생산성은 증가한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실업이 늘어날 것이라 지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라고 말한다.

이를 요즘 경제학에서는 ‘효율성 임금’이라고 하는데,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이미 고액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금융기관이나 대기업의 수장들이 고연봉을 받으면서 내세우는 인센티브 효과란 건 그리 신뢰할만한 얘기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이씨의 생각은 “자본주의를 위해서라도 이젠 분배를 중시하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는 데로 모아진다. 그는 “우선 분배 문제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면서 “‘사회주의는 비참함을 공평하게 나누는 경제이고, 자본주의는 축복을 조금 불평등하게 나누어가는 경제’라는 윈스턴 처칠식의 고전적인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너무 어려워서 읽기를 포기했다면 이상헌 박사의 책을 들고 이 시대 가장 뜨거운 주제 속으로 들어가도 좋겠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