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곽효정] 느리게 걸으면 보이는 것들

입력 2015-07-29 00:30

“여기서 도둑 만나면 못 잡아. 숨차서 죽을지도 모르거든.” 페루 쿠스코에서 있었던 일이다. 빨리 움직이면 숨이 차는 고산지대에서 나는 늦게 걷고 오래 쉬어야 했다. 함께 간 친구는 원래 걸음이 느려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지만 나는 달랐다. 등굣길이나 출근길에서도 앞서 걷기 좋아했기에 느린 동작이 영 어색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조급한 사람이 되었을까. 느리게 걷는 친구 곁에 나란히 걸어보았다. 지나가는 아이의 미소를 볼 수 있었고 바닥에 핀 들꽃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소소한 것들에 눈이 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면 남들에게 뒤처지더라도 느리게 움직이면 여태껏 보지 못했던 작고 예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앞에서 버스를 놓칠 때면 속상했고 좁은 골목길에 아이들이 천천히 걷고 있으면 짜증이 났다. 그렇다. 날마다 경쟁해야 하는 이곳은 여행에서 배운 것들을 적용하기엔 너무 바쁜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서울역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할머니를 만났다. “아가씨, 여기 가려면 어디서 버스 타야 해?” 버스정류장을 한참 헤맨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가방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무거웠다. 할머니가 들기에 벅찬 무게였다. 시골에서 아들네 집에 간다고 감자며 김치를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나보다 뒤처졌던 사람들이 모두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와 보조를 맞춰 느리게 걷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힘없고 느린 여행자의 가방을 들어주는 일이었고 그 어떤 경쟁보다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낯선 이에게 모처럼만에 베푼 배려가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했다. 이렇듯 천천히 걸으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을 나는 쉽게 잊고 지냈다. 이제는 걸음이 빨라질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둘러봐야겠다.

곽효정(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