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니까. 나는 스포츠 에이전트다.”(영화 ‘제리 맥과이어’ 中)
1996년 개봉한 영화 ‘제리 맥과이어’는 거대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사에서 70여 명의 선수들을 보이지 않게 관리하는 주인공을 통해 국내에선 생소한 스포츠 에이전트의 세계를 보여줬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국내에서도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직업이 각광받고 있다. 최근엔 정부와 여당이 스포츠 산업 육성과 선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포츠 에이전트제 도입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다시 한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 1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스포츠 산업 진흥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한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은 “구단의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선수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며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스포츠 에이전트의 세계=스포츠 에이전트 업무는 크게 선수 에이전트와 매치 에이전트 두 종류로 나뉜다.
선수 에이전트는 선수를 발굴해 스폰서(후원사)를 구해주고, 구단 입단과 연봉협상 등을 지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에이전트와 매니지먼트 업무가 혼재돼 있다. 한국 농구의 1세대 에이전트로 불리는 비스스포츠 대표 서동규 에이전트는 두 업무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했다.
에이전트는 선수 뒤에서 협상과 계약을 주업무로 한다면 매니지먼트는 선수의 스케줄을 짜서 1년 내내 함께 움직이며 관리한다.
서 에이전트는 “야구, 축구, 농구 등 구기 종목은 에이전트 업무에 가깝고 김연아, 박태환, 손연재 등 개인종목 선수 관리는 매니지먼트에 가깝다”고 했다.
수입은 제각각이다. 지난 해 11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지가 ‘2014년 에이전트 수입 톱10’을 발표한 것을 보면 스캇 보라스의 보라스 코퍼레이션은 총 19억4000만 달러(약 2조2364억원)의 계약을 성사해 9700만 달러의 수수료를 챙겨 1위를 차지했다.
이에 비해 국내 스포츠 에이전트는 걸음마 수준이다. 국내 스포츠 에이전트 시장이 커지려면 해외에 진출한 국내 선수들의 활약이 중요하다.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류현진(LA 다저스)과 강정호(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좋은 성적을 내면서 최근 스카우터들이 박병호(넥센 히어로즈)나 손아섭(롯데 자이언츠) 등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매치 에이전트는 맞대결할 상대를 찾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축구의 경우 매치 에이전트가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된 국가간 친선경기나 A매치를 주선한다.
◇에이전트가 되려면=농구와 축구는 스포츠 에이전트 자격제나 등록제를 시행하고 있다. 국제농구연맹(FIBA)은 매년 상·하반기 농구 규정과 계약에 필요한 법 등을 묻는 시험을 거쳐야 자격증을 준다. 축구의 경우 지난해까지 FIFA에서 일괄적으로 자격시험을 진행하던 것을 올해부터 각국 협회에서 운영하도록 했다. 대한축구협회도 올 4월부터 중개인 등록제를 시행하고 있다.
자격증 취득은 어렵지 않다. 최근 FIBA 자격증을 취득한 한 에이전트는 “겉으로 보기엔 번지르르해 보이는데 난이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축구는 중개인 활동에 결격 사유가 없다면 누구나 수시로 등록이 가능하다. 협회 사이트에서 다운 받은 신청서를 작성해 중개인 서약서, 범죄사실증명서와 함께 제출하면 심사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 FIBA는 매년 100스위스프랑(약 12만원)의 연회비를 내야하고 축구는 첫 해 70만원을 내고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반면 야구는 에이전트 제도 자체를 반대하고 있어 자격증이나 등록증이 없다. 지난 2001년 3월 공정거래위원회는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에이전트 제도 도입을 권고했지만 KBO는 제도 도입이 이르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스포츠 에이전트 관계자들은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격증이나 등록증이 아니라고 말한다. 선수의 자질과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 스포츠 전반에 대한 지식과 이벤트 기획력 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해외 네트워크를 위한 외국어 능력, 선수와 함께 꿈과 목표를 만들어갈 수 있는 소통 능력도 필요하다.
◇스포츠 에이전트, 전문 시스템 도입될까=스포츠 관계자들은 “스포츠 에이전트 산업이 활성화되려면 전문적인 교육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올 초 박태환이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소속사의 위기관리 능력이 도마에 올랐다. 현재 박태환의 소속사 팀GMP는 아버지가 대표를 맡고 누나가 마케팅 팀장, 매형이 매니저 역할을 하는 ‘가족 기획사’다. 박태환처럼 국내 스포츠 산업 구조상 스타 선수들을 관리하는 기획사를 가족이 운영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다 보니 경험도 부족하고 위기관리 능력도 떨어진다.
스포츠산업진흥법은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적인 에이전트를 육성하는 시스템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강 의원실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이나 단체를 선수 대리인 양성기관으로 정하고 양성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법 개정에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스포츠 에이전트가 변호사들의 밥그릇을 챙겨주기 위한 법안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문체부 관계자는 “스포츠 에이전트 업무를 하려면 법인이 변호사를 채용하거나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선수들간 부익부 빈익빈을 조성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양해영 KBO 사무총장은 “일부 자유계약선수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에이전트 제도까지 도입할 경우 비용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에이전트, 보이지 않는 세계… ‘스포츠 산업 진흥법 개정안’ 추진 계기로 본 국내 실태
입력 2015-07-29 0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