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이 모여 차 마시는 곳을 순례하는 전도는 꽤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질문하는 부분도 공개적으로 설명해 주면 관심을 나타내고 주일날 교회로 찾아오곤 했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오든 성전에 들어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 과정이고 그들이 영적으로 깨어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야 한다고 여겼다.
말도 문화도 잘 모르는 내가 그들을 메시지로 감동시켜 신자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도록 마음을 비운 것이다.
방글라데시 우기는 5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다. 우기에는 국토의 70%가 물에 잠기다시피 바뀌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기에는 일거리가 없어져 굶는 이들이 더 늘어났다.
주민들이 사는 집은 나무로 얼기설기 기둥을 세워 움막을 만들고 지붕은 함석 하나를 올려놓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 움막은 낮 동안 열을 받아 밤에 들어가도 실내가 40도나 되었다. 우기엔 물이 허리까지 차 집에서 살 수가 없는데도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왜 물 속에서 집을 지키느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으면 이것마저 다 뜯어가 버린다는 설명에 할 말이 없었다. 주민들이 굶는 것을 보다 못한 나는 쌈짓돈까지 다 꺼내 쌀을 사고 토요일에 교회로 오면 나눠줄테니 굶는 사람들은 이웃까지 데려오라고 광고를 했다.
쌀 값은 싼 편이어서 수십 포대를 사 두었다. 토요일 아침 교회 앞에 나와 보니 깜짝 놀랐다. 혹시 늦어 쌀을 받지 못할까 걱정돼 달려 온 주민들의 긴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말라 뼈만 남은 주민들의 쾡한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이들에게 쌀만 나눌 것이 아니라 복음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단상으로 올라가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중 일이고 나는 선교사로서 사명을 다해야 했다.
일부 항의를 받으면서도 메시지를 끝낸 나는 한 줄로 선 주민들에 쌀 배급을 시작했다. 150명에서 많아야 200명이 올 것이라 여기고 3㎏씩 줄 쌀을 준비했는데 500명이 넘게 오는 바람에 1㎏씩밖에 줄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모두 쌀을 받아들고 기쁜 표정으로 교회를 나섰다. 지구촌 한편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을 하는데 어느 한편은 죽도 못 먹어 죽어가는 현실이 참으로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주민들이 너무나 불쌍해 선교비를 모두 털어 써도 언제나 부족했다. 예산을 세울 것도 없이 선교비는 들어오기가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둘째인 아들 돌이 되었는데 마침 돈이 딱 떨어져 우리도 굶게 생겼다. 아이의 돌 상 차려주는 것을 생략하고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선교사 모임에서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각자 돈을 조금씩 추렴해 돌잔치 상을 차려 주었다. 비록 이틀이 지난 돌 잔치였지만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고무풍선 장식을 멋지게 해 준 선교사 사모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하나님. 동역자들을 보내 아들 돌상을 차려 주시고 축하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을 내어 방글라데시 선교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학교를 운영하며 사역하는 가운데 예상치 않았던 첫 번째 고난이 다가왔다. 우리를 파송해 준 모 교회에서 교회가 어렵다며 후원선교비를 말 그대로 딱 끊어 버린 것이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천록 (6) “쌀만 나눠주면 안되겠다”… 단상에 올라 예수 증거
입력 2015-07-29 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