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엘리트 스포츠가 필요한 이유

입력 2015-07-28 00:38

대국굴기(大國?起)는 ‘대국이 일어서다’라는 뜻으로 2006년 11월 중국 국영방송 CCTV-2를 통해 방영된 12부작 역사 다큐멘터리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미국 등 세계 근현대사의 주역이 된 9개국이 대국으로 발돋움한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국내에서는 교육방송이 이듬해 1월 첫 방송에 이어 시청자들의 거센 요청으로 그해 7월 재방송까지 했다.

일본이 세계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러일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청일전쟁 직후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배권을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열강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일본이 승리했다. 1905년의 일이다.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를 향해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게 된다.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한 국가가 오랜 잠을 털고 일어나는 데는 이처럼 작은 사건이 계기가 된다. 대국굴기에 나오는 국가들이 모두 그러했다.

1347년 전 고구려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드넓은 만주의 지배권을 상실한 한민족에게 그 이후의 역사는 축소일변도였다. 근세 들어서도 일본 식민지배라는 치욕을 맛본 뒤에는 3년간 골육상잔의 전쟁도 치러야 했다. 마치 저주를 받은 듯한 이 땅의 흑역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원도 돈도 없었던 불모의 이 땅은 불과 50년 만에 세계 10위의 무역 대국으로 발돋움한다. 반만년 농업국가에서 반도체, IT, 자동차 등 첨단 산업 국가의 일원이 된 이 나라 민초를 일으켜 세운 굴기의 계기는 무엇일까. 더러는 정치적 리더십을 들기도 하고, 유별난 교육열을 꼽기도 한다. 하지만 소모적 논쟁으로 날을 새우는 국회 모습을 보면 정치적 리더십은 아닌 듯하고 아직 제대로 된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것을 봐서 교육열이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 같지는 않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억하는가.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30여년 만에 국가를 재건한 한국이 개발도상국 중 처음으로 치른 올림픽이다.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전 세계 스포츠·문화 축제를 치른다는 올림픽 본래의 의미를 넘어 비로소 세계사의 주역이 됐다는 자부심으로 한 달여의 들뜬 시간을 보냈다. 그 앞서 반쪽 대회로 치러진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의 파행 운영을 극복하고 온전히 전 인류를 한데 묶은 올림픽을 우리가 치러낸 것이다. 마치 세계사의 변방이던 일본이 러시아를 극복하고 세계사의 전면으로 부상했듯 한번도 세계사의 주역이 되지 못한 한국이 올림픽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스포츠는 우리 현대사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내 모든 영역을 총망라해 스포츠만큼 국민적 자부심과 자신감을 불어넣은 분야는 없을 것이다. 동·하계올림픽과 각종 국제 대회에서 보여준 경쟁력,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얻은 운영 노하우는 물론 국민의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든 스포츠는 문화 그 자체가 돼 버렸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달 초 광주 유니버시아드에서 한국이 국제종합대회 사상 첫 종합 우승을 차지한 것은 기념비적 성과다. 국가 간 메달 경쟁이 국력 대결 양상으로 펼쳐지는 스포츠 전쟁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은 체육인을 포함한 전 국민의 승리로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최근 다소 느슨해지는 엘리트 스포츠 육성책에 정부가 더욱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국민적 자부심을 키우는 데는 스포츠만한 것이 없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