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7)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사임

입력 2015-07-28 00:54
윌리엄 스크랜턴이 1907년 6월 14일 선교사직 사임 의사를 밝힌 편지.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구내에 있는 해리스 감독 부조 모습. 이덕주 교수 제공

1905년 초반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연합 논의가 활발했다.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은 몇 가지 합의 사항을 이끌어내며 선교 사역의 초교파적 연합을 추구했다. 그 결과물이 1905년 9월 11일 조직된 ‘한국복음주의선교연합공의회’였다. 선교사들은 공의회를 통해 교육과 의료, 문서출판, 선교지 분할협정 같은 초교파 연합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스크랜턴이 속한 감리교 선교사들도 대부분 연합을 지지했다. 동아시아 선교 관리를 맡은 해리스 감독이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턴도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들 스크랜턴은 달랐다.

연합을 하되 교파 정체성은 살리자고 호소

윌리엄 스크랜턴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정체성 상실이었다. 그는 “조직 통합이 아니라 형제로서 상부상조하여 개별적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며 그의 입장을 밝혔다. 연합 논의는 하되 교파교회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협력과 상조를 실천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선교 협력과 연합운동을 지지했다. 그런 맥락에서 감리교의 배재학당과 장로교의 경신학교를 통합해 1906년 10월 개교한 합성중학교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배재학당은 감리교 선교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스크랜턴은 당시 대부분 선교사가 합성중 운영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던 것과는 달리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결국 장로교 학교로 변질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합성중 이외에도 합동출판사 설립이나 장·감 연합 찬송가 발행도 경계했다. 스크랜턴은 “한국에서 감리교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선교본부에 호소했다.

때마침 합성중에서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정동에서 연지동까지 통학해서 장로교 선교사들의 관리와 교육을 받는 감리교 학생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배재학당 동문과 감리교인들로부터 ‘배재학당을 복원하라’는 요구가 선교부에 쇄도했다. 합성중의 ‘실험 수업’도 2년 만에 종결됐다. 단일 개신교단인 ‘대한예수교회’ 설립도 정치적 문제에 봉착해 포기하고 말았다.

선교사직 사임을 결정하다

1907년은 한국교회와 사회, 한민족 모두에게 격동과 충격, 갈등과 혼돈의 시기였다. 당시는 교회사적으로는 대부흥의 시대였다.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전국에 타올랐다. 하지만 한민족은 사회·정치적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구한국 부대를 해산시켰다. 항일 민족저항운동도 거세게 일어나 기독교인들의 희생도 줄을 이었다.

스크랜턴은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종교적 영역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교와 목회 사역에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종교적으로 양극단이 충돌하는 극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웠다. 더욱이 그는 초교파 연합 합동운동에 선교사들과 의견이 달랐고 1906년 해리스 감독에 의해 단행된 직제 개편으로 ‘총리사’ 직책을 박탈당했다. 미국 선교본부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거취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선교부 안에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외로운 처지가 됐다.

타협이나 순응의 길도 있었지만 그것은 미국 동부 청교도 개척이민의 후예로서 명문 예일대 출신인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07년 연회 직전 감리교회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선교사직 사임 의사를 밝힌 것은 연회 개회 4일 전인 1907년 6월 14일 선교본부 레너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그는 “이번 연회 회기 안에 선교회에서 사직하기로 했음을 귀하를 통해 선교본부에 알리는 바입니다. 선교사를 사직할 뿐 아니라 연회 목사직도 사임하겠습니다”고 밝혔다.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더욱이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가 선교지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려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감리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점이 더욱 가슴이 아팠다. 편지는 연회 직전 방한 중인 레너드 총무에게 제출했다. 감독과 총무, 선교사들은 그의 사임을 만류했으나 그의 의지는 완강했다.

내쫓긴 개척 선교사

그의 사직은 표면적으로는 대한제국에서 요청하는 ‘의학교육’에 종사하기 위한 자원 사직이었지만 실제는 직속상관인 해리스 감독과의 갈등, 미국 선교본부와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퇴장이었다. 그래서 그가 감리교회를 버리고 떠났다기보다 내몰려 쫓겨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게다가 스크랜턴은 한국교회 목회자나 교인 사이에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감독과 선교본부, 타 선교사들 사이의 불화와 갈등 때문에 감리교 ‘밖으로’ 나간 것이다. 한국 교인들은 섭섭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한국 선교를 개척하고 선교 사역의 기반을 조성했던 개척 선교사 당사자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떠났다는 것은 한국 감리교회로서는 적지 않은 손실이었다. 연회를 주재했던 크랜스턴 감독의 심정도 착잡했다. 그는 스크랜턴의 사임 배경이 해리스 감독과의 불화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반영해서였을까. 그는 연회 마지막 날, 폐회사에서 “해리스 감독은 앞으로 한국선교에 집중할 것”이며 “속히 한국말을 배워 한국말로 설교하라”고 주문했다.

7년 선배였던 크랜스턴은 해리스 감독이 일본어는 유창하게 하면서 한국에 와서는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통역을 내세워 영어로만 대화하는 해리스 감독을 지켜봤다. 거기서 일본과는 가깝고 한국과는 거리가 먼 선교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한국인 입장에서 한국 선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을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리스는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는 1916년 은퇴할 때까지 대표적 친일파 선교사로서 그 노선과 입장을 견지했다. 해리스 감독이 친일 노선을 취하며 한국 감리교회를 관리하던 시기(1907∼1916년)에, 감리교회 밖으로 추방당한 스크랜턴은 한국과 중국, 일본을 떠돌며 유랑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