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이다. 사정에 따라 어느 집은 공항으로 향할 것이며, 또 어느 집은 국내의 산이나 바다를 찾아 힐링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여행지로 떠나기 전, 혹은 그곳에서 돌아와 휴가기간의 자투리가 있다면 전시장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여행이 물리적인 장소 이동이라고 할 때 이를 가장 구체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것은 공항이다. 또 고요히 자신을 돌아보며 ‘와유(臥遊)’의 시간 갖는다면 영혼을 살찌우는 내면으로의 여행이 될 것이다. 그렇게 외부로 향하거나 혹은 내부로 향하는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이 두 전시를 권한다. 하나는 유럽 작가들의 전위적인 설치미술이고 다른 하나는 묵향 그윽한 옛 그림 전시다. 전시 내용과 외양은 대비되듯 다르지만 하나 같이 성찰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같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구태여 멀리 가지 않아도 사랑방에 걸린 족자 한점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심신을 쉬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를 ‘와유(臥遊)’라 했다. 와유는 휴식이지만, 동시에 그림을 통해 내면의 나를 만나러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매·난·국·죽-선비의 향기’전은 묵향과 함께 하는 침잠의 시간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조선 중기 탄은 이정에서 구한말의 석파 이하응까지 조선시대를 풍미한 화가들의 사군자 100여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묵죽의 대가 이정의 ‘삼정첩(三淨帖)’이다. 세 가지 맑음을 뜻하는 화첩에는 4군자 중 대나무, 매화, 난초 세 가지 그림 20점이 장정되어 있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부분적으로 전시된 적이 있지만 20점 모두가 한꺼번에 나온 건 처음이다. 특히 대나무가 12점으로 가장 많은데, 모든 종류를 시각화했다. 바람이 일거나 비에 젖은 대나무, 어리거나 수령이 오래된 대나무 등 각각 기법과 시적 정취가 달라서 한점 한점마다 오래 머물게 한다. 검은 비단에 금가루로 그려 그림 자체도 묵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귀족적 기품이 전해진다.
이것만으로도 눈의 호사지만 깊은 사연까지 있다. 세종의 왕손인 이정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나갈 뻔 한 고초를 겪었다.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수 있는 치명적 부상을 이겨낸 그는 후대에 남길 필생의 역작을 기획한다. 전란 중에도 최고가의 미술재료인 금가루를 사용한 것은 임금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우국충정을 담은 자작시가 곁들여졌고 당대 명사들이 다투듯 써준 글과 글씨는 이 시대의 교유의 문화를 전한다. 작품에 찬탄한 최립이 서문을 작성했고, 한석봉이 이를 글씨로 옮겼다. 이 화첩은 불에 타서 사라질 뻔한 위기도 겪었다. 서문 일부가 불탔지만 다행히 한석봉이 한 벌 더 써 둔 게 있어 불탄 흔적이 있는 서문과 같이 장정됐다.
사군자는 주로 선비들이 그리던 문인화의 세계였다. 강세황, 심사정 등 문인들의 같은 듯 다른 사군자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조선 후기 최고 화가인 김홍도는 화원화가였음에도 사군자를 남겼다. 정조의 사랑을 받아 연풍(지금의 충북 괴산) 현감을 지낸 뒤 양반적 삶을 지향했던 그의 세계관이 읽혀진다. 전시장의 마지막은 김홍도의 매화 작품 ‘백매(白梅)’가 장식한다. 화사한 홍매화가 아니라 단아한 흰 매화를 그린 것이다. 서민의 일상을 담은 풍속화가로만 알려졌던 김홍도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기개와 절개, 절제와 고결함으로 조선 선비들의 향기를 상징하던 사군자화는 조선 말기로 가면서 중국 영향을 받아 장식적이고 과시적으로 바뀌어간다. 민영익의 난초 그림에선 난초의 가지가 무성한데, 이는 이전 시기에서는 볼 수 없던 특징이다. 일제 강점기 최고 인기 화가였던 김규진의 통죽은 크고 퉁퉁해 비육한 느낌을 준다. 입장료는 성인 8000원, 청소년 6000원. 전시는 8월 30일까지(070-7774-2523).
손영옥 선임기자
방콕형 ‘와유파’라면 묵향 속 침잠의 시간… ‘매·난·국·죽-선비의 향기’전
입력 2015-07-27 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