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천록 (4) 방문전도 환자 병 낫자 주민들 찾아와 기도 부탁

입력 2015-07-27 00:55
열병을 앓는 소년이 살고 있는 움막집을 찾아가 기도해주고 있는 박천록 선교사.

전도차 처음으로 찾은 빈민촌 움막집에는 열병환자가 누워 있었다. 40도가 넘는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오한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데 아무런 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폐병 말기로 죽음을 기다리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난 한국에서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시면 병에서 나음을 입습니다. 나도 10년 전 당신과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겠다는 그의 말에 영접기도를 시킨 뒤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옆 움막으로 가보니 노인 한 분이 쪼그리고 있는데 눈을 씻고 봐도 집에 음식이 전혀 없었다. 며칠은 굶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 예수 믿으세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가난을 벗어나게 해 주시고 복을 주셔서 생활이 풍족하게 바뀌게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겠다고 말하는 그분에게 100타카(2000원)를 드렸다. 쌀 10㎏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렇게 가가호호 방문전도를 했는데 모두 예수를 믿겠다고 해 전도가 너무 잘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때 선교사란 신분이 노출되면 안돼 학교를 운영하는 사장이라고 했다. 모두들 내가 돈이 많다고 생각했는지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내 말을 들으면 뭐라도 생긴다고 판단해 무조건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다시 사장이란 명함 대신 무조건 나를 ‘브라더’(친구)라고 부르도록 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살려고 온 친구이니 이렇게 불러 달라고 했는데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내가 거리에 나서면 이곳저곳에서 ‘브라더’ ‘브라더’라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내 이름이 정말 ‘브라더’인 것으로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긍휼하게 여기셨는지 내가 방문한 가정의 환자가 치료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놀란 주민들은 내게 찾아와 기도를 부탁했고 어떤 이는 기도 한번 받는데 얼마를 내면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방글라데시 빈민촌 몰라땍에서 사역하는 나를 어여삐 여겨 신유의 능력을 주신 것이라 여겨졌다.

나는 기도로 병이 나은 환자에게 주일에 학교로 예배를 드리러 오라고 했는데 단 몇 주 만에 150명이 모였다. 50명이면 꽉 차 버리는 성전인데 최대한 끼어 앉고 문 밖까지 앉아야 했다.

나는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가 선교가 힘들다고 들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교회로 이렇게만 몰려온다면 너무나 신나게 선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절절히 체험해본 터였기에 이곳 목회가 너무 쉬운 것 같아 신기할 정도였다.

“주님. 이렇게만 주민들이 교회로 몰려온다면 방글라데시 선교사 할 만합니다. 이곳에 마음을 붙이고 평생 선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아직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상태였기에 한 기도였다.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내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식은 많이 낳아 한 가정이 10여명은 예사였다. 교회에 나와 며칠째 굶었다며 배고픈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목사로서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들을 최대한 도와야 했다.

그러나 이곳의 구제 사역은 하면 할수록 내미는 손길이 더 많아졌다. 여기에다 교회 비품은 사다놓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전에 있는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고 해도 소용 없었다. 나는 계속 참았는데 비싼 돈을 들여 사놓은 반주용 키보드까지 사라지자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