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읍성.
사람들은 흥해라는 인구 4만여명의 소도읍을 잘 모른다. 경북 포항시에 있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다. 흥해읍성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위치한다.
흥해는 신라∼조선기 바닷가 한적한 어촌 포항리를 품은 큰 고을이었다. 이웃한 경주군(경주시)과 세를 겨룰 정도였다. 흥해향교가 고등과정인 중교(中校)였던 것에서도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한반도 호랑이꼬리로 불리는 지역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철강도시 포항의 모교회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사실상 실국(失國)이나 다름없었다. 그해 흥해 사람 김상연이 대구 여행을 갔다가 크리스천 이기우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게 된다. 이기우는 미국 선교사 맹의와(Edward Frost McFarland)로부터 파송 받은 전도인이었다.
김상연은 흥해로 돌아와 그 복음을 친구 이춘옥 김균옥 등에게 전했다. 이들이 첫 예배를 드린 바로 이 해가 흥해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1928년 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김상연으로부터 시작하는 흥해 복음화의 궤적을 적었다. 이들은 선교사 안의와(James E. Adams) 명의로 설립했다. 이때 김상연은 영수가 됐다. 1924년 발행된 ‘경북교회사’에서도 이같은 역사적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 ‘흥해제일교회 100년사’는 김상연 영수의 부인 최북서 권찰(1980년 작고)의 구술을 정리해 반영했다. 최 권찰은 100세까지 장수했다.
복음이 전해지기 전까지 바닷가 마을은 수천 년 간 내려온 동제, 산신제, 풍어제, 굿, 점술 등 우상숭배의 암흑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안동 및 경주 문화권이 갖는 특수성은 완고한 사회질서를 낳았으며 그러한 질서는 예수 팔복의 의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산은 전래 종교가, 평야는 사족이, 바닷가는 무속이 애통해 하는 자를 낳았다.
김대현 장로 등 교계리더들 배출
교회 설립 5년 만에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이 시작됐다.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복음이었고, 교회는 복음의 실천을 위해 기독교 교육에 앞장섰다. 1920년대 교회는 명신학교를 설립, 크리스천 엘리트를 배출했다. 그들은 교회를 예수 본영 삼아 서울과 평양, 나아가 만주 등으로 나가 헌신했다.
초대 박문찬 목사(1878∼1967)는 흥해기독교청년회를 이끌며 야학을 일으키고 농촌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민족의식 계몽 강연회와 근대 체육활동도 박 목사와 교회 청년부가 이끌었다. 당시 교회 청년회 사업으로 시종(時鐘)을 설치했다는 내용은 불과 한 세기 전이 전근대였음을 상기 시킨다.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 최성묵 목사(1930∼92·부산 중부교회)도 훗날 이 청년회의 회장이었다.
만석꾼 편도현은 명신학교를 설립자였다. 박문찬 목사가 교장, 김대현 장로가 학감으로 인재를 양성했다. 박 목사는 훗날 사회사업에도 뜻을 두고 대구 맹아학교와 한국사회사업대학(대구대 전신) 등 특수학교 설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교회 초대장로 김대현(1867∼1940)은 박 목사의 가르침을 이어 받았다. 그는 흥해 장터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는 쪽복음 전도인의 외침을 듣고 서른여덟 늦은 나이에 예수를 영접했다. 그는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장로로 장립(1918)하게 된다. 그리고 훗날 서울 승동교회로 이명하여(1922) 한국 교계 지도자가 된다. 그는 ‘금필헌(金必獻) 정신’ 즉 ‘하나님께 필히 바쳐야 할 돈’이란 성서적 개념을 갖고 저축을 했고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 가진 전 재산을 바쳐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를 설립했다.
그 정신은 장남 김영철(전 의사), 손자 김홍수(전 외무부 공보관) 등으로 이어져 지금도 ‘교육 기부 기독교 명문가’로 남았다. 이들 외에도 3.1만세에 앞장섰던 송문수 장로, 일경의 문화정치에 맞섰던 박영조 목사 등이 암울한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한 리더들이다.
인민군 치하, 교회 폭격 맞아 전소
민족교회 고난은 일제의 태평양전쟁 시작과 함께 노골화되어 해방 직전엔 교회 폐쇄 지경에 이르렀다. 박문찬 목사 양아들인 박순석 목사(재임 1943∼49)는 그 탄압을 기도의 힘으로 이겨내지 않으면 안됐다. 일경은 설교 전 강단을 짓밟고 올라가 훈시했고, 천왕 외에 왕이 없다며 ‘왕’ ‘만왕의 왕’ ‘태평왕’ 등이 들어간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십자가 군병들아’ 등 20여곡이 금지곡이었다. 이 곡들은 찢기거나 X표가 쳐졌다. 박순석 목사는 창씨 개명 요구에 대해 “나는 신라 6부 촌장의 추대를 받은 왕이다”라며 ‘육부왕’ 개명으로 맞섰으며 결국 일경이 지명 수배를 내렸다. 그의 아들 박정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 소재를 요구하는 일경에 물고문을 당했다. 훗날 박순석 목사는 제헌국회 의원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이루고 지켜온 신앙의 유업은 민족상잔의 비극에 잿더미가 되고 만다. 1950년 6.25발발과 함께 흥해읍이 전쟁터가 되고 만 것이다. 형산강 전선 이북이었던 흥해는 인민군 접수지역이었고 미군 전투기의 집중 포격 대상이었다. 미군은 통상 예배당을 인민위원회가 쓰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교회도 폭격하게 됐고 교회를 포함한 흥해읍 전체는 참화를 면치 못했다.
“전 재산의 십일조 교회 건축에 바칩시다”
지난 21일 정언용 목사와 흥해제일교회 당회실에서 공병성(89) 배길도(80) 박철화(71) 원로장로, 황동욱(69) 황면화(66) 공원식(62) 이정학(60) 오철진(58) 시무장로 등이 함께 했다. 대개 선대의 신앙 속에서 격변기를 보내고 이제는 자녀가 그들의 신앙을 이어가는 믿음의 아버지들이었다. 공직, 교직, 자영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 공동체 안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늘 하나였다.
공병성 장로는 스물한 살 때 예수를 믿기 시작, 60년 간 한 번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다. 구순인 지금도 새벽 제단을 쌓는다. 그의 아들(공명탁·창원 하나교회)과 두 사위는 목사다. 이들의 젊은 시절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가난하지 않았던 이들이다. 나눔을 통해 복에 복을 더하는 은사를 경험했다.
1980년 지금의 새 교회당이 기공됐다. 그러나 건축예산은 턱 없이 모자랐다. 이때 성전건축위원장 공병성 장로 등 당회원 7인은 재산의 십일조를 바치자고 결의했다. 놀랍게도 단 한사람도 반대하지 않았다. 되레 집사 직분자들도 나섰다. 여신도들은 가까운 칠포해수욕장에 국수집을 열어 건축기금을 모았다. 태풍으로 천막이 날아가 버리는 곡절을 겪었다. 그러자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은사가 이들에게 쏟아졌다.
공병성 장로의 경우. 그는 당시 논 8마지기(4000㎡)를 바쳤다. 노모가 3일 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속상해서다. 한데 그해 그보다 더 많은 논을 샀다. 치과기공사 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당회원들에게도 다양한 방법으로 물질적 축복이 주어졌다.
이러한 복음 정신은 오늘날 국내외 교회 건축, 푸드뱅크, 병원선교, 해피하우스 등으로 이어진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축복을 받는 영광된 길이었다.
포항=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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