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지갑 다 털어도 딱 5만원밖에 안 남았던 때가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IMF 환란이라고 부르는 시기였다. 나는 그때 지방에 살면서 과외와 번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끊어졌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던 곳이라 난방이 기름보일러였는데, 하루 이틀 안에 기름도 떨어질 형편이었다.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하루 종일 라디오를 틀어놓고 살았다. 내가 살던 곳은 TV 난시청 지역이었으므로 라디오 하나가 세상과 연결된 통로였고, 그게 꽤 위로가 됐다. 그날은 라디오 소리도 듣기 싫었다. 마음이 차가운 돌덩이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오직 세상이 밉고 싫고 짜증난다는 것뿐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라디오를 끄려고 일어섰는데,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얼마 전에 저 노래를 들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저 노래 하나를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는데, 그때와 지금은 뭐가 다르지?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쪼들리지 않고 생활한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이었다. 이제 손 쓸 도리 없이 까마득한 밑바닥으로 떨어질 거라는 두려움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그날 초등학생이던 아들과 서울에 올라가 대형 스크린이 있던 옛 대한극장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남은 돈으로 피자도 사먹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그해 겨울을 난 뒤 봄에 일거리를 구했다.
얼마 전,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이 국가 장학금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나의 연소득이 우리나라 하위 30%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따금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명품이나 호텔 뷔페 같은 건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가난은 힘든 것이지만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멸보다 더 끔찍하지는 않다.
부희령(소설가)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았다
입력 2015-07-24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