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마가복음 성경번역 130주년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 가족을 떠나 동료 선교사 곁에 눕다

입력 2015-07-25 00:21
고베 외국인묘지에 묻힌 스크랜턴 묘소에 국내 기독 역사학자들이 함께 했다. 왼쪽부터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이덕주 감신대 교수,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박흥식 서울대 교수.
가가와 기념관
관세이가쿠인대학 우에가하라 캠퍼스 전경.
관세이가쿠인대학 관계자가 이 대학 총장이자 선교사였던 베이츠 박사가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금고 형태로 된 가정용 신사가 뒤로 보인다.
지난 3일 답사팀은 일본 효고현 현청 소재지이자 일본에서 6번째로 큰 도시인 고베(神戶)로 향했다. 고베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로코산 전망대에 오르자 멀리 오사카 항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을 돌려 시내를 훑었다. 대지진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고층 빌딩과 숲, 집들이 촘촘했다. 1995년 대지진 이후 고베는 일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변모 중이라 한다. 지진이 발생하면 향후 100년은 지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설이 있어 인구 유입도 빠르다.

스크랜턴, 외롭지 않았다

고베는 한국 기독교와 인연이 깊다. 로코산 중턱에 자리 잡은 외국인묘지에는 바로 한국 감리교 선교의 개척자였던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가 잠들어 있다. 스크랜턴은 1907년 ‘극친일파’ 해리스 감독의 통제와 간섭에 반발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교직을 옮긴 후 서울과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한 뒤 1917년 고베로 건너와 의사로 활동하다 1922년 별세했다.

이덕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은 “그는 왜 여기 묻혀 있는 걸까요” 하고 물었다. 이 소장은 “어머니는 서울 양화진에, 아버지는 미국에, 자신은 이곳 고베에 묻혔다. 외로운 선교사였다”며 “셋째 사위의 권총 자살 소식을 접하고 한 달 만에 쓸쓸히 숨졌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답사팀은 저마다 안타까운 탄식을 터뜨리며 무덤으로 향했다.

그의 묘는 단촐했다. 정사각형 비석 위에 십자가 하나가 전부였다. 묘비명은 간단했다.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을 추모하며. 1922년 3월 23일, 65세의 일기로 잠들다.’ 인생의 마지막은 외로웠을지 몰라도 다행히 그가 누운 곳은 외롭게 보이진 않았다. 그가 세웠던 교회 중 하나인 아현교회가 1999년 6월 28일 검은 돌로 제작한 기념비를 설치했다.

스크랜턴의 무덤 10m 인근에는 1920∼30년대 한국의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영(Young) 선교사의 무덤도 있었다. 캐나다 장로교 출신 영 선교사는 당시 가장 큰 규모의 고베조선기독교회를 담임하기도 했는데 일본에 노동자로 이주를 떠난 동포들을 달래며 복음을 전했다.

영 선교사 묘소 바로 옆에는 일본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며 ‘풀턴선언’을 내놓아 1930∼40년대 한국의 신사참배 저항 기류에 영향을 미친 풀턴 선교사 부친의 묘소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일본 태생의 풀턴 선교사가 일본 신도(神道)의 실체를 알고 당시 선교부 총무로서 강력한 반대를 했었다”며 “스크랜턴과 영, 풀턴 선교사의 넋을 기리는 발걸음은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로서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고베 외국인묘지는 반드시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 일본 문화 특성상 정숙을 유지해야 한다.

가가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했던 사람

답사팀은 이어 고베시 츄오구 아즈마도리에 위치한 가가와 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은 일본 빈민 운동가이자 협동조합 운동가, 소설가이며 목사였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가가와 목사는 1909년 고베 신카와 강변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예수단교회’를 세우고 협동조합과 노동운동, 복지사업, 무산정당운동, 기독교 전도사업 등에 힘썼다. 그는 예수단교회 안에 우애(友愛)구제진료소를 두고 진료활동도 전개해 빈민들의 희망이 됐다. 지금의 기념관은 바로 예수단교회 부지에 세워 그의 신앙과 사회선교 활동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덕주 소장은 “가가와는 2세대 일본 기독교인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개혁주의 청빈의 삶을 중시했다”며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신국(神國)’을 추구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의 빈민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가가와 목사는 19세 때 폐결핵을 앓고 선교사가 운영하는 요양소에서 기적적으로 치유 받으며 신학을 공부한다. 미국서 돌아온 그는 자전적 소설, ‘사선을 넘어서’를 출판해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는 그가 한국교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가가와 목사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과 34년, 42년에 한국을 방문해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비판하고 반전 평화를 외쳤다. 주기철 목사는 “일본인 중에도 신앙을 공유할 수 있는 양심적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두 번이나 한국을 방문하며 교류했다.

기념관 전시실 안쪽에는 그가 평생 저술한 350여권의 저서가 꽂혀 있었다.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저작이 많았다. 대표작 ‘사선을 넘어서’ ‘우애의 경제학’은 한글 책이 전시돼 있었다. 영문서 ‘The religion of Jesus and love the law of life’ 등이 돋보였고 일본어 책이 빼곡했다.

총장실의 비밀

가가와 기념관을 뒤로 하고 차량으로 40분을 달려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이르면 미국 남감리교회가 세운 관세이가쿠인대학(關西學院) 우에가하라 캠퍼스를 만난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다 갑자기 나타난 캠퍼스 풍광은 감탄을 자아낸다. 하늘로 쭉 뻗은 야자수 아래로 지중해식 2층 건물이 인상적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대학을 연상케 하는 오렌지색 지붕과 아이보리색 건물 벽면, 그리고 펼쳐진 녹색 잔디와 캠퍼스 뒤로 보이는 산(山)은 카메라를 저절로 갖다 대게 만들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의 하나로 전해진다.

이 학교는 해방 후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 지도자로 활약한 이들이 많이 거쳤다. 국제와이즈맨클럽 총재를 지낸 엄요섭 목사를 비롯해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를 역임한 김춘배 목사도 1930년대 이 학교에 유학했다. 감신대 학장을 지낸 홍현설 박사와 김용옥 교수, 이화여대 현영학 교수, 새문안교회 3대 김영주 목사, 강남대 2대 총장을 지낸 이호빈 박사 등이 거쳤다.

학교 시계탑 중앙에는 이 학교의 모토인 ‘봉사를 위한 수양(Mastery for service)’이라는 글자가 상징문양과 함께 새겨져 있다. 캐나다 감리교에서 파송된 선교사이자 4대 총장 베이츠 박사가 만든 표어다. 신학부 건물에는 아담한 채플이 있는데 노랑색 스테인드글라스에 성공회식 강단은 학교의 전통을 느끼게 했다.

답사팀은 베이츠 박사가 마주했던 일제의 흔적을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폐쇄된 총장실에 설치된 벽면 금고가 공개된 것이다. 1929년 설치된 금고는 모두 3중으로 돼있었다. 그러나 금고는 아니었다. 3개의 문을 열자 ‘가미다나’ 라는 가정용(소형) 신사가 나왔다. 학교 관계자에 따르면 베이츠 박사는 일본 정부가 대학 정문에 신사를 설치하라는 요구에 맞서, 자신의 방에만 신사를 설치하고 대표로 참배하되, 교직원과 학생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한다. 당시 가미다나 안에는 천황 부부 사진도 있었다고 한다. 선교사로서의 저항이었던 셈이다.

애틋한 심정으로 학교를 나온 답사팀은 이만열 명예교수가 선창하는 아리랑 곡조의 ‘예수님, 예수님’ 찬양을 불렀다. “예수님∼예수님∼ 우리 구∼주 예수님∼,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 한이 없∼는 그 사랑∼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고베=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